취재를 위해 뛰어다니느라 발뒷꿈치가 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다. 거짓말을 하면 바로 나타나는 피노키오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최인하(박신혜 분)는 송차옥(진경 분)의 딸이다.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의 딸도 아닌 단지 최인하일 뿐이다. 아니 그 이름도 지운다. 송차옥의 딸 최인하도, 한때 삼촌과 조카 사이였던 최인하도 지운 채 그저 '너'라고만 부른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기하명(이종석 분)이든 최달포든 결국 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일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고, 그동안 가족으로 여겨온 사람들이 불러준 이름이었다. 이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수단에 불과하다. 진실은 그 본질에 있다.
기하명의 이름을 바꾸었더니 최달포가 된다. 다시 원래의 이름을 찾으려 하니 최달포가 기하명이 된다.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진실이란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맞져지는, 실재하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누군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그것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CCTV동영상 원본을 편집하여 필요한 장면만을 남기고, 혹시라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주변의 다른 CCTV영상까지 꼼꼼하게 찾아 필요한 하나만을 남긴다. 그것은 실재하는 유일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실인가. 아주 작은 단서까지 꼼꼼히 찾아서 지우는 그 집요함과 철저함에 오히려 기하명은 그 뒤에 더 큰 진실이 감춰져 있음을 눈치채고 만다. 그러나 대부분 눈앞에 사실이 놓여 있으면 거기서 멈추고 만다.
대중이 의외로 쉽게 기만당하고 선동당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당장 보이고 들리는 사실들만을 따라가기도 버거운데 그 이면의 진실까지 찾아내기에는 너무 번거롭고 수고스럽다. 하나의 이슈가 지나면 다시 새로운 이슈가 찾아온다. 화재의 책임을 일개 지구대 순경인 안찬수(이주승 분)에게 모두 떠넘긴 채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리면 이제 곧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이슈가 화재 자체를 가려버릴 것이다. 설사 안찬수의 억울함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그때가면 누구 하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화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하명을 비롯한 기자들은 잠까지 줄여가며 오로지 그 한 가지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과연 평범한 개인들이 아무리 진실을 위한다고 그와 같은 수고와 노력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언론이 중요한 것이다. 바로 그 개인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혹시라도 잘못된 근거로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잠을 둘이고, 뒷꿈치가 까져서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진실을 뒷받침할 사실을 찾아 자동차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이다. 일대를 뒤져서 모든 CCTV를 찾고, 모니터 앞에서 혹시라도 단서를 찾아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본다. 만일 언론이 판단을 잘못한다면 사람들은 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그대로 믿어 버리고 말 것이다. 오히려 그같은 언론의 역할과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필요로 하는 사실과 진실을 언론을 통해 대중이 믿도록 한다.
결국 송차옥과 기하명 개인의 대결이 되고 마는 이유일 것이다. 언론을 이용하든, 아니면 언론으로 인해 피해를 입든,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는 어찌되었든 언론 자신이 쥐고 있다.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부정하게 쓰여진 기사이든, 아니면 언론 본연의 바른 진실을 밝히고자 전력으로 투구한 기사이든, 결국 언론의 지면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질 것이다. 그 배후에 있는 박로사(김해숙 분)의 의도도, 안찬수를 구하려는 기하명의 목적 역시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뉴스를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는 전적으로 그들이 보게 될 기사에 달려있다. 법보다도, 어떤 정의나 규범보다도 언론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언론인 자신의 양심이다.
기자가 직접 얼어붙은 계단에 연탄을 깨서 뿌릴 필요는 없다. 그것은 지자체의 일이다. 기자는 단지 사실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제대로 바르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면 된다. 살인자는 경찰이 잡는다. 화재의 원인을 찾아내고 관련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사법기관이 할 일이다. 대중의 잘못은 대중 자신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자가 쓴 기사가 어느 정도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다. 어째서 기자를 '기레기'라 부르는가. 그 책임 또한 결국 기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하필 피노키오가 제목인 이유를 알았다. 어째서 기자인가도. 다만 그 엄밀함은 부족하다. 치열함은 인정에 가려 눅눅해진다. 진실이란 기자의 무기인 동시에 기자를 구속하는 족쇄다. 진실을 목적으로 삼으며, 한 편으로 진실을 도구처럼 이용한다. 진실의 의미를 잃는다. 최인하의 피노키오는 그 존재를 의심받고 있다.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더라도 이미 기자들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은 도식적이고, 상당부분 진부하다. 주제는 명쾌한데 그 형식이 썩 세련되지 못하다. 지루할 정도다. 내용이 그릇을 정의한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이유다.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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