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대구에서 흩어진 관군들이 이후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등 지역유지들이 일으킨 의병에 합류하며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훈련도 부족했고, 실전경험도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지휘관마저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다.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무모하게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최소한 부산진성과 동래성에서는 자신들을 지휘할 지휘관도 있었고, 성을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차라리 아무라도 나서서 그들에게 대구를 지키라 명령했다면 무모하더라도 목숨을 거는 사람이 일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은 살길을 찾아 흩어져야 했고 적과 싸우고자 하는 이들을 만나며 다시 전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겁장이라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이기기 위해, 적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난 이듬해인 1593년 의주의 조정에서 전국의 병력현황을 파악하여 정리한 결과 모두 17만 2천 4뱅병의 병력이 집계되고 있었다. 의병까지 포함한 수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의병 자체가 전쟁초기 어이없이 흩어졌던 관군들이 다시 재집결한 것이라 본다면 전근대라고 하는 시대의 한계를 감안했을 때 놀라울 정도의 동원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 무렵에는 벌써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경상도의 여러 지역들이 수복되어 경상좌도에 한효순과 박진이 각각 1만과 2만 5천, 경상우도에서는 김성일과 김시민이 각각 1만 5천 씩의 병력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싸우고 있었다. 그만큼 200년의 평화는 길었고, 전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뜻일 것이다. 무능한 것이 아닌 전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했던 것 뿐이었다.
바로 그것이 신립(김형일 분)과 이일이 감당해야 했던 고민이었다. 제승방략의 문제도 문제지만 일본군이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아직 조선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을 대비할만한 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란 조선인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고, 따라서 전쟁이 일어난 그 순간에조차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 간격을 비집고 일본군은 이렇다 할 싸움 한 번 없이 한양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전과확대나 점령지확보를 외면한 채 오로지 한양만을 보고 진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어떻게 일본군과 맞서싸울 것인가?
이일이 일본군이 이미 가까이까지 진군해왔다는 개령 백성의 보고를 무시하고, 심지어 목까지 베어야 했던 이유였다. 연이은 패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군민의 불안과 공포는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가까이에 일본군이 도착해 있다면 동요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맞서싸우기 위해서는 이일에게도 시간이 필요했고, 당시 상주의 상황이란 관아의 곳간까지 열어 백성을 불러모으고서야 겨우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정도로 너무 열악했다. 일본군이 상주를 공격했을 당시도 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겨우 모은 병사들에게 진법을 훈련시키던 도중이었으니, 고작 병사들의 이탈을 막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적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칫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다. 선택은 제한되어 있었다.
신립이 조령이 아닌 탄금대(정확히는 달천평야)에서 고니시(이광기 분)의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했던 것 또한 바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밀양과 대구까지 함락당하고 상주에서는 이일마저 패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적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지는데 그에 비례해 조선군의 사기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한양에서 이끌고 간 정예라 할 수 있는 경군은 그렇다 하더라도 현지에서 징집한 농민들은 아직 전장의 공포와 맞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복잡한 명령을 실행하기가 불가능할 때 가장 확실한 것은 일단 사지로 몰아넣어 목숨걸고 싸우도록 하는 것 뿐이다. 여진족을 유린하던 조선의 기병을 믿었고, 신립 자신을 믿었다. 하지만 비까지 내린 달천은 습지였고, 2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단련된 일본군은 신립이 생각한 이상으로 노련했다. 한양까지 퇴각하여 방어전을 펼치는 경우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배제되었다. 이길 수 없다면 달천에서 뼈를 묻어야만 했었다.
결국 전쟁이란 기세싸움인 것이다. 이긴 쪽이 사기가 오르고, 사기가 오른 쪽이 이긴다. 지는 쪽은 사기가 떨어지고, 사기가 떨어진 쪽은 진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승패가 정해지면 전세를 뒤집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진주성싸움이 중요한 것이다. 이순신도 바다에서 연이어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며 일본의 기세를 꺾었지만, 그보다 더 육상에서의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한 진주성에서의 승리야 말로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환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주성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은 위축되었고 반대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자신감을 가지고 일본군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신립에게 요구되었던 역할이었을 테지만, 그러나 이미 기세를 타기 시작한 일본군을 상대로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하기는 어차피 지는 전재을 승리로 이끌 정도의 명장이란 역사상 매우 드물 것이다. 그만큼 처음부터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코 무능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겁장이들만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일 역시 최선을 다해 싸웠었다. 한양에서 병력을 모으고, 다시 상주로 가서도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최대한 병력을 확보했다. 일본군이 상주를 공격했을 때도 앞장서서 싸웠고, 상주에서 도망친 뒤에는 조령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방어를 계획했다. 숫적으로 열세인데다, 훈련도 실전경험도 부족한 병력으로, 그것도 기습까지 당한 상황에서 그저 이기지 못한 것만을 비난한다면 부당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 아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들에 대한 고찰과 반성이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 반성이 없는 비판은 단지 배설이다. 아쉬움은 있을지라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제작환경의 열악함이 TV화면을 통해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최대한 카메라의 각도를 좁히려 한다. 최소한의 인원과 최소한의 배경만이 나오도록. 인물이 중심이 된다. 아무리 비중이 높아도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면서도 소품과 의상, 세트에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전투장면의 연출에도 소홀하지 않고 있다.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KBS만의 노하우가 일정한 경지에 오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로서의 긴장감과 재미는 더욱 커지는 듯하다. 그 노력만큼은 어느 역사드라마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상주에서 이일까지 패전하며 달천평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신립이 맞선다. 끝까지 고니시는 전쟁에 반대하며 조선과의 화평을 위해 계획을 꾸민다. 실제의 역사와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과 일본은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이웃일 것이다. 증오보다는 화해와 이해를. 하지만 전쟁이다. 참혹하다. 모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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