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 - 냄새를 본다, 간명하고 직관적인 설정

까칠부 2015. 4. 2. 04:14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결국 아이디어만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아이디어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떠올린 놀라운 아이디어에 스스로 도취되고 만다. 아이디어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보다 단순하게. 보다 직관적으로.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에서도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오직 하나, 눈으로 냄새를 볼 수 있다.


더구나 TV드라마다. 주인공이 아무리 냄새를 잘맡는다고 TV를 지켜보는 시청자가 그런 것까지 직관적으로 알아 볼 수 있을 리 없다. 장황하고 부자연스러운 설명이 뒤따르거나, 결국 TV라고 하는 매체에 어울리게 시각화 과정을 거치거나. 그래서 아예 냄새를 CG를 사용해 구현하며 주인공 오초림(신세경 분)으로 하여금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만든다. 


미용실 강도의 뒤를 쫓으며 미용실 강도가 남긴 냄새를 통해 그 행동을 시각화하여 재구성할 때, 어쩌면 후각이 사람보다 1만 배 이상 예민하다는 개가 냄새를 통해 인지하는 세상이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새롭지만 그렇다고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닌 현실과의 접점이 자연스러운 설득력을 가지도록 만든다. 냄새를 본다는 설정이 너무 낯설다면 후각이 너무 발달한 나머지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듯 시각으로 구체화되어 인지되고 있다 여겨도 좋을 것이다.


설정은 설정, 드라마는 드라마다. 냄새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3년 전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교통사고가 나고 무려 193일이나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 과정에서 뇌나 신경계통이 이상이 생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고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앞으로 드라마의 내용과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범인으로부터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같은 날 교통사고를 당한 또래의 여학생 가운데 같은 이름을 가진 최은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최무각(박유천 분)은 그날 사랑하는 동생을 잃어야 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다.


3년 전 그들은 전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초림이 운전하는 차에 최무각의 오토바이가 부딪히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들의 시간 속에 서로의 존재란 없었다. 아니 우연한 부딪힘을 통해 만나고 함께 미용실 강도를 쫓는 동안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여전히 낯설 뿐이었다. 그래서 운명이라 말하는 것일 게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낯선 서로가 그러나 과거의 불행한 우연에 의해 처음부터 단단히 엮여 있었다. 그대로 헤어져 전혀 타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테지만 - 어쩌면 실제 그동안 몇 번이나 그래왔는지도 모른다 -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흐르기 시작한 새로운 시간은 그들은 다른 운명으로 이끌게 된다.


3년 전에도 막 여동생을 살해한 범인이 최무각의 앞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여동생을 살해한 범인이 무심히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최은설이었던 모든 기억을 잃은 오초림 역시 그를 보면서도 전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 의미없이 스쳐지나는 수많은 일상들처럼 그렇게 간절한 의미들이 마치 조롱하듯 그들의 주위를 맴돈다. 서로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별개의 사건으로 인해 얽힌 인연이 예정처럼 그들을 같은 시간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하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서로가 존재하지 않던 오랜 과거의 기억마저 자신을 위한 의미로써 여겨지게 된다.


이름 그대로다. 설정상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각이란 곧 무각(無覺)으로 들리기 쉽다. 감각이 없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에 짓눌려 있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었다. 혹시라도 다칠까 아플까 마음졸이던 여동생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끔찍한 모습으로 눈앞에 누워 있었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여동생이 참혹하게 살해당했는데 그 범인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무엇보다 범인에게 여동생이 겪어야 했을 끔찍한 고통을 돌려주고 싶다. 그를 끝없이 내몰고 있는 것은 오빠로서의 여동생에 대한 의무이며 사명이다. 그때까지는 아파도, 아니 여동생을 죽인 범인을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관심도 흥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치유의 과정일 것이다.


대비가 흥미롭다. 후각이 시각화되며 비교할 수 없이 예민해진 오초림에 대해, 최무각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여러 감각들이 마비되어 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범인과 격투를 벌이고 마침내 체포할 수 있다. 예민한 오초림의 감각이 범인을 뒤쫓는다. 더하고 빼니까 제로(0)가 된다. 아니 후각이 몇 배 예민해지고, 범인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될 고통과 공포가 마비되었으니 플러스(+)가 된다. 그러나 둘 다 결국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냄새를 눈으로 보는 것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나. 상처투성이의 두 남녀가 어떻게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위한 답을 찾아나서게 될까?


한 눈에 설정과 구도가 들어온다. 어떤 드라마인가. 어떤 내용일 것인가. 그러면서도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캐릭터의 개성과 매력일 것이다. 과연 냄새를 눈으로 보는 능력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갈까. 그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갈까. 어쩌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이들 실패했었다. 출발은 좋다. 설정이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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