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부패와 능력...

까칠부 2015. 4. 4. 02:17

100의 자원을 가지고 100만큼의 성과를 낸다.

 

사실 이것도 굉장히 유능한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이길 싸움에 이기고 질 싸움에 지는 것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구분할 수 있다.

 

싸워야 할 때와 물러설 때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낭비가 없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싸움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100의 자원으로 150, 200을 만드는 것이 유능한 것이다.

 

그런데 부패했다.

 

100의 자원 가운데 일부가 개인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150의 성과를 냈다고 그것들이 온전히 남아있을 리 없다.

 

결국 낭비가 생긴다. 그 만큼 사회적으로는 손실이다.

 

하지만 당장 내 집값 올려줄 테니까. 내 땅값 올려줄 테니까.

 

부패했어도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다.

 

나만 잘되면 돼.

 

사회가 일정 수준 이상 부패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부패가 정의가 된다.

 

차라리 부패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부패가 능력이라는 이유는 그 부패를 스스로 동경하고 있기 때문.

 

그러니까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더러도 보상금 얼마인가를 두고 시비거는 것 아니던가.

 

자식의 목숨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죽일 수 있다.

 

물론 남의 자식만.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 절망한 이유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였어도 나를 잘살게 했으니까.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어도 나는 괜찮았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르친다. 너만 성공하라. 너만 부자가 되라.

 

이른바 4자방에 대한 분노보다 무상복지에 대한 불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4자방은 잘만 하면 내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무상복지는 아니다.

 

물론 내가 받는 무상복지는 별개.

 

역사상 대부분의 국가와 문명이 결국 내부의 부패로 인해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죽는 그 순간까지 죽는 것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살다 간다. 어차피 그리 긴 인생도 아니다. 뉴스들이 재미있다.

 

넋두리다. 나는 2007년 이미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