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과 그를 따르는 무뢰배들에 의해 일어난 계유정난은 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조선전기의 역사를 단절시킨 일대사건이었을 것이다.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위민과 성리학의 윤리와 이상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도학이 곧 조선의 이념이었다. 태종에 의해 정변이 일어나 정도전이 살해되고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이 이선으로 물러난 뒤에도 그 당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아니었다. 신하로써 왕을 내쫓고, 숙부로써 조카를 살해했다. 하기는 조카 뿐인가.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 동복형제는 서모이기도 했던 혜빈 양씨와 이복형제인 그의 소생들마저 모두 살해하고 있었다. 유교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충과 효의 가치일 텐데, 수양대군은 신하로써 임금을 살해함으로써 충을 배반했고,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들을 죽이고 그 후손마저 끊음으로써 효를 부정했다. 결국 선위라는 형태를 빌어 왕위에 올라 명분과 힘을 모두 지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당대는 물론 수백년이나 지난 후대에서조차 그와 관련한 비판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조선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탈이고 폭거였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하기는 자신들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가 어떤 것인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역시. 그래서 더욱 뭉쳐야 했다. 애초부터 권력을 쥐고자 저지른 일들이었고, 기껏 손에 넣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뭉쳐야만 했다. 대의는 사라졌다.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민본의 대의도, 성리학적 가치와 이념을 현실에서 이루고자 했던 처음의 이상 역시. 급격히 부패한다. 그토록 강한 왕권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세조조차 공신들의 비리와 부패를 통제하기는 커녕 사실상 방조한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은 처음 말한 왕조라고 하는 명분과 그들이 가진 현실의 힘 뿐이었다. 그들이 옳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조선사회는 무력하게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었다.
이후 수십년의 세월은 조선이 도덕적으로 정체되어 있던 시간이었다. 이상은 꺾이고, 이념은 더럽혀졌다. 개별적인 정책 몇 가지 정도는 현실에서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더 이상 조선은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말았다. 공신들이 앞장서서 백성들을 수탈하고, 조정은 그것을 최소한 방조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세운 왕권을 배경삼아 마음껏 타락하고 전횡을 일삼아도 현실적으로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란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래도 나라를 바르게 바꿔보겠다고 출사한 사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같은 현실의 모순과 맞서기에도 버거울 뿐이었다. 당장의 문제들에 대처하기만도 급급할 뿐 그것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도록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때 조광조가 나타난 것이었다.
성리학의 이상과 이념을 현실에 구현한다. 철저히 성리학적 가치와 윤리에 입각한 나라를 세운다. 백성을 위하고, 인의와 예절이 바로서고,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역할에 충실하는. 물론 여러가지 오류가 있기는 했다. 현실과 유리된 정책들로 인해 혼란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자신을 발탁한 왕마저 설득하지 못해 스스로 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바를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던 조선사회에 있어 그것은 하나의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훈구파의 젊은 자제들마저 사림의 이름높은 선비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스스로 그들과 입장을 함께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훈구파의 권력이는 힘만 있을 뿐 정의는 없다. 내일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
말하자면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인의 평가인 공칠과삼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모두 옳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잘했다고 평가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 했는가다. 그를 통해 후배들에게 남겨준 의미이며 과제다. 성리학의 이상과 이념을 실천하는 나라를 만들겠다. 훈구파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지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훈구파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 시간은 과거의 것들을 역사의 저편으로 밀어내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박정희를 싫어한다. 이승만 이후 이 땅을 지배한 독재정권의 무도함을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인정하는 것이 있다. 아직까지 박정희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유효한 이유이기도 하다. 비전이었다. 조국근대화와 부국강병이라고 하는 명징한 현실인식과 과제였다. 그것을 부수지 못한다. 특히 IMF라고 하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겪으며 박정희가 주장했던 이들 가치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그늘 아래 존재하고 있다.
박정희의 대항마라면 김대중이었다. 박정희가 성장과 발전을 앞세웠다면 김대중은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반공보다는 대화와 협력, 공존의 가치를 내세웠다. 그 계승자가 노무현이다. 구민주당지지자들이 무어라 평가하든 노무현이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 가치들은 정확히 김대중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래서 문제다. 노무현 다음이 없다. 박정희 다음은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이명박과 박근혜. 그들은 철저히 박정희를 계승한다. 그런데 정작 야권에서는 노무현은 물론 김대중을 계승하겠다는 사람이 한 명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이 선택된 이유다. 정동영은 노무현을 계승하기를 거부했다.
내가 안철수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철수는 그의 지지자들과 같다. 구야권에 대한 부채도 동즤이식도 없다. 철저히 타자로서 거리를 두고 대한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과거의 운동권을 혐오한다. 그동안의 서사적 과정을 철저히 무시한 채 현상으로서만 정치를 이해하려 한다. 그같은 그들의 타자적 태도는 당장의 새정연의 위기에 대한 냉소로써 나타나고 있다.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나서서 위기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문재인의 위기를 즐기며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 한다. 그렇다고 과연 안철수가 박정희와 김대중을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상징이 되고 규준이 된다. 회의적이다.
누가 새정연의 주인인가. 누가 새정연에 대한 책임을 지는가. 결국은 누구를 계승하는가일 것이다.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방향을 제시했다. 진보진영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역할을 할 사람이 없다. 선지자이며, 순교자이고,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상징과 같은 존재다. 누가 김대중을 계승하는가. 누가 노무현을 계승하는가. 같은 비노라 해도 박지원 등 동교동계와 김한길 등이 보이는 온도차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무엇이 지금 가장 소중한가.
조광조를 비웃는다. 사림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시대의 과제였고 지향이었다. 어떻게 당시 조선의 모순과 혼란을 극복할 것인가. 조광조 말고는 없었다. 때로 역사는 단 한 사람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조선 전기를 지배한 것이 정도전이었다면, 조선중후기를 지배한 것은 조광조였다. 현대에도 그것은 의미를 갖는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이고, 어떤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말로만 계승을 말할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노무현이라는, 혹은 참여정부라는 단어만 들려도 냉정을 잃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을 말하려면 그 노무현이 지금에 있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 실제로서 보여주어야 한다. 노무현의 내일이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내려놓는다. 참 어려운 것이다. 정치란. 역사는 반복된다. 교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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