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주목했다. 퇴계 이황의 주리론 역시 인간의 도덕적 이성이 자발적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그같은 철학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의 사유 자체가 뇌세포의 물리적 현상에 불과할 텐데?
얼마전 드레스의 색깔을 가지고 한창 인터넷이 뜨거웠었다. 단지 조명이 바뀐 것이었다. 다른 조명 아래 드레스를 보니 드레스의 색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있었다.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안이비설신의도 없다. 색과 공이 같고,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단지 언어의 나열이다. 그조차 0과 1로 이루어진 단순한 코드의 조합일 것이다. 그것을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보고 듣고 느낀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낫다. 그러나 정확히 배고픈데 소크라테스가 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역사상 많은 철학자, 사상가, 종교지도자들이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었다. 그만한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 절박한 환경에서 태어나면 그 절박함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만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만들어야 한다. 주기론이 주장한 바다.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예를 배우고 익히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성인의 도도 알게 될 것이다. 조선후기 예학이 바로 그것이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끼 밥을 준다면 오로지 그 밥을 먹느라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준다면 그는 양심도 체면도 잊고 오로지 물만을 탐하게 될 것이다. 배가 부르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목을 축이고 나면 어떻게 물을 마실 것인가를 궁리하게 된다. 그것이 이성이다. 훈련을 통해서 굶주림과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그같은 환경을 만들어 굶주림과 목마름에도 자신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도록 만든다. 그것이 교육이고 제도다. 그같은 노력들이 전제되고서야 비로소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 갔다 와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주위의 증언도 있었다. 군대에서의 왕따와 가혹행위는 당한 사람만 그 고통을 안다. 어떤 사람은 견딘다. 어떤 사람은 견디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누구는 견디고 누구는 견디지 못했는가. 어째서 어떤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고도 견뎠는데, 어떤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가. 무엇보다 그럼에도 더 이상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최소한 나라가 강제로 끌고가서 군복무를 시켰다면 군대에서 발생한 질병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더 이상 미숙한 개인의 책임으로 이와 같은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러나 그조차 가해자를 옹호하고 동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맞다. 동정한다. 살인행위 자체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이라는 죄를 짓고 만 인간 그 자체를 동정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같은 극단으로 내몰고 있었는가. 누가 그에게 그같은 극단을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는가. 하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개인의 악으로만 단정지으려 한다. 세월호는 단지 선주의 비리가 문제였던 사고였다.
징집대상자들에게도 엄격한 정신감정을 실시하고, 군복무 도중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없도록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만든다. 전역하고 나서도 국가의 책임 아래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들이 보다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복지다. 복지란 베푸는 것이 아닌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가난에 지친 누군가가 생종을 위해 범죄에 물드는 것을 막는다.
인간은 자유의지의 존재인가.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가. 그렇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개인의 노력이 사회의 선과 정의를 위한 전제가 된다. 모든 것은 개인의 잘못이며 책임이다. 환상은 깨진다. 인간의 이성은 항상 새로운 지혜를 탐구한다. 인간이란 어쩌면 가엾을 정도로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일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슬프다.
희생자들이 안타깝다. 그야말로 억울한 피해이고 희생일 것이다. 분명한 가해자다. 여지없이 그것은 죄였다. 하지만 그래서 묻게 된다.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국가와 사회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모든 최선을 다했는가. 인간이 슬픈 것이다. 우울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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