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단지 권력의지에 불과하다. 무척 좋아하는 말이다. 선악이 아니다. 정의도 아니다. 이해도 아니다. 단지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의지가 이전투구하는 전장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권력이 단지 폭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더 강한 폭력을 가지는가. 개인의 폭력이거나, 혹은 집단의 폭력이거나, 더 강한 폭력을 가진 자가 더 큰 권력을 쥐게 된다. 경쟁이 시작된다. 더 강한 폭력을 가지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간단히 무협소설을 떠올려보면 된다.
종교가 권력이던 시절에는 누구나 신실한 신의 대리인이기를 원했다. 지성이 권력이던 시절에는 더 많은 지식과 깊은 이해를 쌓기 위해 밤을 새가며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돈이 권력이던 시대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쟁했고, 혈연이 곧 권력이던 시대에는 더 순수한 피를 얻고자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
역시 아주 쉽고 단순한 문제다. 과연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이 있어야 권력을 가질 수 있는가. 무엇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가. 유권자의 표다. 대중의 지지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무엇보다 대중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어떻게 하면 대중의 호감을 얻고 그것을 정치적 지지로까지 이어갈 수 있는가.
내가 여러 정치적 현안에 대해 정치인을 비판하기보다 차라리 대중을, 유권자를, 국민들에 책임을 물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들이 부정과 부패를 싫어한다. 잘못을 저지르면 유권자에 의해 표로써 심판받는다. 무능과 비리가 드러나면 대중에 의해 자칫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과연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고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큰 비리가 드러나도 여전히 그 정당을 지지한다. 아무리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여전히 그 정당과 정치인에 표를 준다. 그로 인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야기되는데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전혀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그같은 신호를 유권자 스스로 정치권에 보내고 있기도 했다. 정권심판론은 안된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심판이 아닌 이익이 될 수 있는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
부패해도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저 내게 이익만 주면 된다. 아무리 정치를 엉망으로 했어도 당장 내게 이익이 될 것 같은 공약만 할 수 있으면 된다. 심지어 야권지지자들마저 그런 소리를 한다. 심판은 안된다. 심판만으로는 안된다. 그런데도 정치인들더러 청렴하라, 성실하라 요구할 수 있을까? 정작 유권자가 표를 주는 기준이 그것이 아닌데도.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란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데도 말이다.
정치인을 욕할 필요 없다. 그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것은 다름아닌 국민 자신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철저하게 엄격하게 살피고 살펴서 판단했는가. 아니 투표할 당시에야 속아서 그랬다 치더라도 실체가 드러난 다음에는 또 얼마나 냉철하게 판단하여 심판하고 있는가. 그저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당장의 이미지에만 현혹되어 자신의 권리를 내던지고 있느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에 대한 모든 책임은 곧 모든 국민들이 지게 된다. 기권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기권이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꺼이 그에 동의하겠다는 암묵적 선언이다. 패배한 쪽은 승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더 열심히 반대쪽과 중간을 설득하여 자신들 편으로 돌아서게 해야만 했다. 그러라고 선거운동이 있다. 투표라는 것을 한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권리란 없다.
2차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국민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권리로 선택한 댓가를 치르고 있었다. 침략자가 아니었다. 반란군도 아니었다. 힘으로 부당하게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권력을 차지했던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을 만큼의 지지가 그들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약속한대로 현실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히틀러와 나치가 폭주하던 시절 그들에 대한 지지는 더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과연 2차세계대전의 모든 책임이 히틀러와 나치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 4대강만 하더라도 당시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발표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경선과정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선거에서 당시의 대통령은 승리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나마 타협해서 4대강이었다. 여전히 해당 지역과 그 정당의 지지자 가운데는 4대강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기도 하다. 그런데도 단지 정당과 정치인들에게만 책임을 물릴 수 있을까?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면서 그에 반대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표를 주어 대거 당선시켜주었다. 불법정치자금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서 하필 그 당사자들에게 표를 주어 당선시켜주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월호든, 성완종리스트든 결국 선거의 결과를 따라가고 있다.
언론을 탓할 것도 없다. 앞뒤 문맥만 따라가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논거인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받아먹기만 하려 한다. 어머니 말씀이다.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 게으른 자에게 돌아갈 것은 없다.
아무리 정부가 잘못해도 더 이상 심판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는 근엄하게 타이르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에 동의하는 여러 주장과 여론들을 살피면서, 과연 이 나라에는 미래란 없구나. 세월호도, 이번 메르스도 결국 둘이 아니다. 하나다. 그래도 지지를 받는다. 그래도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학습한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국민은 지지해주고 표를 준다. 그저 외국에만 나가 있어도 지지율은 오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지율은 더 높아만진다. 누구의 책임일까?
그래서 나는 정부도, 여당도, 특정 정치인도 비난하지 않는다. 지지율을 본다. 여론을 읽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 권력의지다. 권력에 대한 강한 열망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더 오래 지키고 싶다. 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야당을 야당답지 않게 만드는 그들 역시 다수 지지자를 등에 업고 그와 같이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고, 누구에게 권력을 쥐어 줄 것인가. 올바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 댓가는 유권자 자신들이 치르게 된다.
그저 정치가 썩었다. 정치인은 부패하고, 정부는 무능하다. 외면하고 만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고. 그러나 묻는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내가 좌파들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7년의 대선을 기억한다. 이놈도 저놈드 싫으니 투표에 기권하라.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진보논객이 언론의 지면에 기고한 글의 내용이었다. 어차피 그럴 것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도 사회를 위한 유권자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다.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더 이상 심판은 안된다. 선거에 심판을 앞세워서는 안된다.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이익을 주어야만 한다. 최소한 앞으로 10년의 정치를 예상할 수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희망이 없는 이유다.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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