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와 증오의 정치학...

까칠부 2015. 8. 15. 03:08

인간에게는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존재하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공포고, 다른 하나는 증오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밤이다. 아니 굳이 어두운 밤일 필요도 없다. 밝은 대낮인데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무엇도 자신을 위협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서움을 느낀다.


그냥 앉아서 숨만 쉬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잘하면 잘해서 싫고, 못하면 당연히 못하기 때문에 싫다. 아무것도 않는다면 그것이 또 싫은 이유가 된다. 죽으면 미운 감정이 사라질까?


하지만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도, 누군가를 마냥 미워하기만 하는 것도, 결국은 개인에게 부담으로 돌아온다. 무서워할 수만도 없고, 미워할 수만도 없다. 그래서 다른 대상을 찾는다. 무서움도 미움도 잊게 만들,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해 줄 무언가일 것이다. 누군가이기도 하다. 종교란 그래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와 증오에 기대어 성장한다.


정치란 원래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나타난 것이다. 공포를 이기게 만들어준다. 증오를 해소하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영웅이다. 그래서 우상이다. 다른 말로 카리스마라 말한다. 공포가 클수록, 그리고 증오가 깊을수록, 더욱 사람들은 특정한 대상에 자신을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기대가 한 사람에게 투영될 때 그것을 카리스마라 일컫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그러면 달리 인간은 어째서 공포와 증오라는 해결못할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간단하다. 편하기 때문이다. 쉽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무서워하면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미워하게 되면 더 이상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사라진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된다. 하염없이 무서워하고 미워하면서. 무서움과 미움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고서. 무서움과 맞서는 것은 용기이며, 미운 것을 응징하는 것은 정의다. 쉽고 간단한데 아름답고 달콤하다.


지금 당장 지구연방이 스페이스노이드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지배는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다. 우주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은 스페이스노이드에게 지구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언젠가 지구연방을 대신해서 스페이스노이드가 인류의 미래가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예언을 믿는다. 약속을 믿는다. 당장의 공포를 잊고 증오를 달랠 수 있다. 지온 즘 다이쿤이 스페이스노이드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추앙받게 된 이유였다. 이것이야 말로 스페이스노이드가 기대야 할 미래다.


그러나 결국 공포와 증오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약속이 실현된 먼 미래인 것이다. 잊었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달래놓았을 뿐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 무언가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샤아 아즈나블이 유독 지온 즘 다이쿤의 주장 가운데 뉴타입에 집착하게 된 이유이고, 기렌 자비가 그처럼 어이없이 죽고 난 뒤에도 많은 지온주의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샤아 아즈나블은 또다른 기렌 자비였다. 그토록 꿈꾸고 기대했던 뉴타입의 미래라는 희망으로부터 배반당했을 때 샤아 아즈나블에게 남은 것은 이대로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이 계속될 것이라는 공포와 그 당사자들에 대한 증오였다. 이상이 크고 높았던 만큼 그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물론 진정 위대한 정치가였다면 그렇더라도 당장의 공포와 증오에 굴복하여 자신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당장의 공포와 증오를 극복하는 것도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그것을 현실에서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 리더로서 자신의 역할이다. 그것이 용기다. 그것이 의지다.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꿈을 잊지 않는 것. 내일과 사람들을 믿는 것.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다. 그리고 아마도 분명 자신은 그같은 자신이 그리던 미래를 보지 못하기 쉬울 것이다. 성급해진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려 한다. 리더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맡기고 마는 것이 곧 대중의 어리석음일 것이다.


정치인 자신에게만 쉬운 것이 아니다. 대중에게도 쉽다. 저놈은 나쁜 놈이다. 저놈들은 장차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치고 말 것이다. 무찔러야 한다. 배제해야 한다. 용기란 어렵다. 관용은 더 어렵다. 이해는 피곤하다. 공존은 번거롭다. 지구연방을 끝장내자. 지구연방을 끝장내어 당장의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자. 지온 즘 다이쿤이 약속한 스페이스노이드의 미래를 현실에서 완성하자. 그럴 능력이 있어 보였다. 어렵지만 샤아 아즈나블이라면 자신들을 대신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스페이스노이드의 막연한 기대와 믿음이 그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맡기고자 선택하게 만든다. 샤아 아즈나블은 스페이스노이드만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선동한 것이다. 샤아 아즈나블에게 선동당한 것이 아닌 스페이스노이드 자신의 공포와 증오에 선동당한 것이다.


그래서 샤아 아즈나블은 스페이스노이드의 희망이 되었다. 스페이스노이들을 대신해 지구연방을 응징하려 나설 수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것이야 말로 정의이며 진실한 의지라 여기고 있었다. 자신을 지지하며 호응해주는 스페이스노이드가 그 증거였다. 자신과 더불어 샤아의 연설에 환호하는 다른 스페이스노이드들이 그 증거였다. 액시즈를 낙하시켜 지구의 역사를 끝내면 마침내 스페이스노이드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연방의 압제가 사라진 스페이스노이드만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꿈꾸던 미래이고 희망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자신의 열정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깨닫고 만다. 샤아와 함께 액시즈를 떨어뜨리려 목숨까지 걸고 싸우던 네오지온의 병사들마저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일깨우고야 만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양심의 발현이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설득당해서도 아니었다. 아무로 레이는 연설같은 것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단지 자신의 힘으로 액시즈를 밀어올리려 무모하게 나서고 있었을 뿐이었다. 액시즈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연방과 더불어 그들과 함께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며 살아갈 미래 역시 사라지고 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는 미래를 미래라 부르지는 않는다. 미래란 가능성이다. 쟁취하기 위한 의지이고 노력이다. 그것이 희망이다. 꿈이다. 인간이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내일을 믿고 한 발씩 나아간다.


진보란 무엇인가. 샤아는 단지 기렌 자비를 답습했을 뿐이었다. 아버지 지온 즘 다이쿤의 유산에 기대어 그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샤아의 주장에는 내일이 없었다. 오늘의 연장에서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낼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을 믿지 않았다. 내일 역시 믿지 않았다. 그래서 과격한 주장과 행동에 자신을 맡긴 것이었다. 샤아에게는 절망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오로지 아무로 레이만이 인간과 역사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인간은 나아간다. 역사는 진보해간다. 조금 돌아가고 때로 물러서더라도 언젠가 꿈꾸는 그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아무로 레이가 심지어 자신의 적들마저 말 한 마디 더하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치가로서 마지막 순간 아무로 레이가 샤아를 이겼다.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의도한 것일 터다. '역습의 샤아'에서의 샤아 아즈나블은 '기동전사 건담'의 작화감독이기도 했던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에서 기렌 자비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구체화된다. 어떻게 인간은, 인간의 사회는, 역사는, 기렌 자비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가. 아돌프 히틀러 역시 다르지 않았다. 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사회는 무척 혼란스러웠었다. 희망이란 아예 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때 짧은 지식과 어설픈 지혜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쉽고 간단하고 편한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진실이라 여겼다. 그것이야 말로 희망이고 꿈이라 말했었다. 천년제국을 꿈꾸었었다. 영원한 게르만민족의 영광을 주장했었다. 독일국민들은 그런 히틀러에 열광하고 있었다.


젊었을 적의 이상에 배반당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아름답고 낙관적이던 미래로부터 철저히 거부당했다. 좌절하고 절망했다. 그래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보다 과격한 수단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다. 자신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속인다. 그런 그들의 간명함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의 반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회는 급격히 우경화되었고 집단화되었다. 과격함이 정의가 되고, 폭력이 행동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진정한 자신들의 미래이고, 꿈이고, 정의일 것인가.


정치가 쉽게 빠져드는 함정이다. 기독교도 성리학도 그래서 인간사회를 정체시키고 타락시켰다. 이미 답을 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결론이 내려졌다고 여겼었다. 그냥 쉽게 안주해 버렸다. 편하게 기대 버렸다. 인간은 꿈을, 이상을, 희망을 잃어 버렸다. 믿어야 할 것은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갈 역사다. 그리 멀지 않은 오늘에 이어질 내일이다. 단순하지만 그것을 잊는다.


어째서 샤아는 그토록 스페이스노이드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환호를 받고 있었는가. 말도 안되게 모순된 그의 주장에 그토록 쉽게 현혹되어 그를 떠받들고 있는가. 샤아 자신은 진정 자신이 주장하는 것들을 믿고 있었는가. 현실의 이야기다. 현실정치의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샤아가 스페이스노이들을 선동하여 정의를 구현하려 행동에 나서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샤아에 이끌린다.


무서운 것이 있으면 도망치고 싶다. 도망칠 수 없다면 무찔러야 한다. 미운 것이 있다면 당연히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편하다. 그러는 것이 쉽다. 이성이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쉽고 편하고 단순한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본능에 이끌리고야 만다.


어렸을 적 샤아의 주장에 잠시 동의했던 적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오히려 젊었을 적에는 히틀러와 같은 이들을 동경하기도 했었다. 무지하며 어리석다. 비겁하고 나태하다. 인간은 성장한다.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