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사랑을 한다. 재난드라마는 재난속에서 사랑을 한다. 물론 사랑하는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랑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만' 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사랑하느라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지 않고, 사랑하느라 재난조차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쩐지 그럴 것 같은 가능성이 엿보이기는 했었다. 재난드라마인데 재난이 주는 위급함이나 긴박함보다는 주요인물 사이의 일상적인 감정과 관계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와 다투고, 누가 누구와 사이가 좋고, 누가 누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어떤 사연들이 감춰져 있고, 어떤 우연들이 겹치고, 그것이 그들 사이에 감정과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진도 6.5의 지진이라면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마저 사라질 것이다.
워낙 상황이 다급하니 의료진이 전혀 잠도 못자고 매달리는 것은 알겠는데, 정작 잠을 안자고 있는 시간에 그들이 하는 것이란 한가한 잡담이 거의다. 더 이상 급하게 실려온 응급환자가 없다 하더라도 응급처치만 마친 환자 가운데 다급한 사람부터 여유가 있을 때 최대한 치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사이 호흡이 늘어날 수 있고 혈압이나 체온이 급하게 떨어질 수도 있다. 호흡과 맥박이 불규칙해서 위급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환자 하나 살리자고 혈소판을 가지러 혈액은행까지 오래도록 시간을 비운다. 이해성(김영광 분) 자신의 말처럼 환자가 그 사람 하나 뿐인 것도 아니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순위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러나 없다. 고작 보이는 장면이라고는 정똘미(정소민 분)가 안대길(성열 분)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이나, 은소율(김정화 분)과 정똘미가 병원밖을 거닐며 한가한 잡담을 나누는 장면 정도가 고작이다. 이해성이 없는 동안 쉬라 하고, 이해성은 3시간 자고 30시간 일하라 말한다. 차라리 그런 시간에 최대한 앉거나 누워서 체력을 비축한다. 갑작스런 사태에 식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혈액을 가지고 오느라 다쳐서 누운 이해성을 치료하면서 정똘미가 새삼 반하고 있었다. 머리를 맞고 쓰러진 사람치고 이해성은 금방 일어나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이후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은 간 데 없고 이해성에게 설레는 정똘미의 모습만 한가득 이어진다.
박건(이경영 분)과 강소란(김혜은 분) 사이의 병원폐쇄를 둔 갈등이야 드라마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강소란이 구자혁(차인표 분)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모성과 환자를 살리고자 하는 의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등치하는 중요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강소란이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의 비중이 크다. 그러나 단지 그 뿐, 과연 지금 강소란이 그토록 살리고자 한 환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강소란이 바란대로 미래병원과 의료진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가. 심지어 미래병원으로 모여든 구조대조차 더 이상 거리로 나가 시민들을 구하고 있지 않다. 재난은 끝났다.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초유의 재난상황인데도 전혀 어떤 다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드라마의 인물들마저도 재난상황치고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하고싶은대로 다 하며 지내고 있다. 농담도 하고, 장난도 하고, 사랑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물론 환자를 살리려 최선을 다하는 사이사이 겨우 비집고 얻어낸 여유일 테지만 시청자는 어차피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볼 수 있다. 픽션이다.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까지 정의한다.
그래도 기대가 컸었다. 특수효과에 많은 돈과 시간, 노력을 기울인 것을 알았다. TV드라마로서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희소성있는 소재이고 장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에도 안전을 위한 담보로 어느 정도 사람 사이의 감정과 관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것만이 남았다. 지진이 사라졌다. 서울은 평화롭다. 아쉽다. 실망마저 넘친다.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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