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장사의 신 객주 - 마침내 돌려받은 유산, 장사꾼 천봉삼이 시작되다

까칠부 2015. 10. 8. 05:35

드라마의 장면이란 연속된 일상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굳이 목소리를 키우지 않더라도 바로 앞에서 스피커를 통해 아주 작은 목소리까지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일부러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더라도 클로즈업을 통해 얼굴과 눈빛의 미세한 변화까지 낱낱이 살필 수 있다. 일상의 말투와 표정, 몸짓만으로도 얼마든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할 수 있다.


물론 주인공이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다. 동몽청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주인공 한 사람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카메라가 쫓는 것은 가장 가운데 있는 단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전혀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주인공 천봉삼(장혁 분)은 그저 혼자서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봉삼과 대립하는 또다른 주요인물 조성준(김명수 분)과 송만치(박상면 분) 또한 오로지 천봉삼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목소리는 커지고, 주위를 아랑곳않는 대사는 서로를 향해 직구로 내리꽂힌다. 드라마는 없다. 그저 대사의 나열만이 있을 뿐이다. 캐릭터조차 없다. 작가의 의도를 시청자에게 전하기 위한 단지 입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 주위의 사람들을 보아야 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리게끔 말해야 했었다. 마찬가지로 배경처럼 서 있는 주변사람들의 작은 표정과 몸짓의 변화에도 작용을 받는다. 한때 책문에서 쇠가죽밀매를 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모두의 앞에서 까발려진다. 상대의 감추고픈 비밀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낱낱이 까발리려 한다.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신과 서로에게 그같은 행위는 어떤 의미로써 작용하고 있을까? 하다못해 시장에 사람이 붐비면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피해 걷는 몸짓은 보인다. 장혁의 열연은 단지 열연일 뿐 드라마에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었다. 작가의 의도만이 넘친다. 시청자가 보고 싶은 것은 드라마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조차도 너무 길다.


그에 비하면 천소례(박은혜 분)와 김학준(김학철 분)의 대화는 굳이 힘을 주거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그들 자신과 서로에 대한 감정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무심코 아버지라는 말을 입밖에 내고 만다. 김학준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갚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그의 여자가 되었다. 그를 위해 웃고 그를 위해 요리를 한다. 오로지 김학철에게 복수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겠다는 결심과 다짐만이 그녀가 견딜 수 있는 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아버지에게 기대고 싶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그녀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아버지였다면. 아버지가 곁에 있었다면. 결코 김학준 앞에서 꺼내서는 안되는 이름이었다.


천소례를 사랑한다. 그만큼 천소례를 의심한다. 사랑하기에 알고 싶다. 사랑하기에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천소례는 조금의 틈도 그에게 허락지 않는다. 온갖 부정하고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많은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지금의 부를 쌓아왔던 경강의 환전상인 김학준에게 있어 의심은 본능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첩의 자식이라는 평생의 열등감도, 상인으로서도 신석주(이덕화 분)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열패감도 모두 잊게 만드는 것이 천소례를 향한 낯선 감정일 것이다. 의심하지만 의심하지 않는다. 아직 김학준에게 적은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적출 김보현(김규철 분)과 육의전 대행수 신석주였을 것이다. 회심의 한 수로 준비한 계획이 길소개(유오성 분)의 기지로 무산되고 만다.


아마 길소개 역시 아직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불과 10년 전이다. 이제 겨우 서른도 한참 전일 것이다. 작은 성공에 도취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다. 순간의 원망을 이기지 못하고 한식구였던 객주인 천오수와 천가객주의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다. 역시 한 순간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천오수의 마지막 당부마저 잊은 채 어린 천소례와 천봉삼을 버리고 떠나오고 말았다. 돌아갈 곳이 없는 다급함이 그로 하여금 신중함을 잊게 만든다. 아직 그만한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서도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맹구범(김일우 분)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감히 대행수 신석주의 장부에까지 손을 댄다. 민겸호(임호 분)의 계획을 좌절시킨 기지는 놀랍지만 그 와중에 자신을 드러내기 급급한 모습은 성급하다. 당장 보이는 배우 유오성의 얼굴보다 길소개가 보이는 섣부른 말과 행동들이 더 인상에 남는다. 의도한 것이라면 역시 탁월하다. 더 능숙해지고 더 노련해져야 한다.


천봉삼을 다시 찾으려 한다. 죽었다 여겼다. 사람들에게도 죽었다 말했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길이 보이고 있다. 김학준의 여자가 된 대가로 김학준의 비밀을 낱낱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외롭던 자신의 곁에도 오득개(임형준 분)라는 믿고 기댈 수 있는 한 사람이 생겼다. 아버지의 복수를 마치고 나면 이제 아버지의 유언을 이룰 차례다. 돌아가려 한다. 벌써 여기까지 온 자신을 과거 자신이 버리고 온 그 순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필사적이다. 구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었다. 원수의 품이기에 그녀는 더 절박하다.


흥선대원군의 실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린다. 안동 김문의 일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도 권력과 결탁하여 벌써 10년째 선혜청 당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육의전 대행수로서 당연히 권력과도 손이 닿아 있기에 신선주의 위세와 영향력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김학준만이 아니다. 천소례와 천봉삼, 길소개, 아직은 젊은 그들이 활약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판을 흔들 필요가 있다. 틈을 비집고 자신들을 위한 기회로 만든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로도 격동의 역사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이 이들 시대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젊은 상인들의 삶에 어떤 계기와 기회가 되어 줄 것인가.


권력의 동기가 열등감이라면 부의 동기는 결핍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전혀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가지려 한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없다. 아무것이든 누구에게든 어떻게든 팔아서 돈을 벌어야 내일을 살 수 있다. 사는(生)는 것인지, 사는(買) 것인지. 비로소 아버지의 유산을 조성준에게서 돌려받는다. 생각이 많았다. 장사꾼 천봉삼의 시작이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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