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란 객관이다. 객관이란 말 그대로 철저히 타자로서 자신과 분리하여 대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 어떤 이유도 사정도 철저히 배제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성이 닿고자 하는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리라 하는 것일 터다.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이란 인간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인간에 속하여 인간의 편에 선다. 개인에 속하며 개인의 처지나 입장에 휘둘린다. 인간의 이성이 진리에 닿기 위해서는 따라서 인간 그 자체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신이 나타난다. 인간의 이성이 비로소 의식하기 시작한 세상의 존재이며 존재하는 질서다. 존재를 넘어선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진리에 다가간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신은 있었다. 정확히 중국에서 신이란 곧 하늘이었다. 하늘이란 섭리였다. 인간과 우주의 질서였다. 그것을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세상이란 하늘 아래 있으며,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달라져도 하늘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영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영원이란 역사였다.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기록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읽힌다. 당사자들은 모두 죽고 없어졌어도 기록을 통해 과거의 사실들이 사람들의 의식에 남아 존재하게 된다. 과연 많은 시간이 지나고 상관없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은 무엇이라 기억되고 있을 것인가.
집안이 절딴났다. 아버지와 형제, 심지어 자식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유교사회에서 제사가 끊기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이다. 후손조차 남기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내버리면서, 그 고통을 견뎌가며 사육신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겠는가. 차라리 그 또한 권력욕에 의한 것이라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그쪽이 자신들에게 더 쉽고 가깝게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왕을 지키기보다 자신들의 정의를 주장하는데 더 열심이었다. 사실은 이기다. 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의한 방법으로 왕이 바뀌었는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으로 기억되고 기록될 것을 두려워했었다. 후손마저 끊겨도 이름이 남아있는 한 역사속에 자신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신숙주는 살아서 영화를 누렸고 죽어서는 많은 후손을 남겼다. 성삼문은 참혹한 고문 끝에 끔찍한 죽음을 맞았고 그 후손마저 끊어지다시피 했다. 물론 딸에게서 낳은 외손이 대대로 성삼문의 제사를 모시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에 전혀 상관없는 보편적인 다수에게 신숙주와 성삼문은 어떤 의미로 기억되는가. 그들의 인식 속에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차라리 죽음보다도, 대가 끊기는 것보다도, 당장의 고통과 왕에 대한 걱정보다도, 그것들이 그들에게는 더 두려운 대상이었다.
조선이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기록에 집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자신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후손들에게 남겨 평가받고자 한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유럽의 역사관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일 것이다. 사실이 아니다. 존재다. 역사기록이란 그 자체로 당시를 살아간 자신들의 존재 자체인 것이다. 후손들에게 읽히고 다시 기억되는 순간 그들은 다시 사는 것이다. 잊혀지는 것이야 말로 죽는 것이다. 더럽고 추한 이름일지라도 남겨짐으로써 그들은 영원을 산다.
기록을 바꾸면 역사가 달라진다. 기술을 달리하면 사실마저 바뀌고 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란 기록하는 사람에 달린 것이고,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역사란 승자의 전리품이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역사앞에 겸허해지려 하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이 과거와 미래마저 모두 결정할 수 있다.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손으로 눈을 가리니 세상이 사라졌다.
역사가 두렵다면 먼저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면 된다. 지금 자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역사속에서 어떤 의미로써 평가받을 것인가. 사람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져도 자신은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 것인가. 후손이 없다. 자식도 없다. 미래도 없다. 아마 그래서인 것인가.
천국과 지옥이 따로 없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다수의 평가야 말로 자신들에게 천국이고 지옥이다. 충신이 된다. 열사가 된다. 간신이 된다. 폭군이 된다. 몇 줄 기록을 바꾸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사실 그 자체를 가리지는 못할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진실을 드러나고 말 것이다. 역사의 의미다.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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