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김영삼과 노무현 - 야당의 계보...

까칠부 2015. 11. 24. 04:51

김대중 지지자들에게는 안된 얘기지만 사실 87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야당의 정통은 다름아닌 김영삼에게 있었다. 김대중이 해외에 머무는 동안 국내에서 민주화투쟁을 이끈 것도 김영삼이었다. 유신이 있기 전 마지막 대선에서 김대중이 후보로 출마하며 다음 대선을 김영삼에게 약속한 것도 있었다. 87년 김대중의 출마는 신의와 원칙을 저버린 권력욕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그래서 김대중은 후보단일화요구를 거절하고 자신있게 출마했던 것과는 달리 김종필만을 아래에 둔 채 김영삼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김대중이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까지 그의 야심을 가로막는 결정적 한계로 작용하게 된다. 심지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김대중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고작 79개의 의석만을 얻는 참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김영삼이 3당합당으로 군사독재의 후신들과 손을 잡고 난 뒤로 거의 유일한 야당의 거물로 남아있었음에도 그를 향한 비토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사실 그것이 문제였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큰 흐름이 김영삼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김영삼이 3당합당으로 민자당을 만들어 그들의 품에 안겨 버렸다. 김대중이 남아 있는데 87년의 기억은 김대중을 마냥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니 아예 함께 야당을 만들어 대선후보로까지 출마해 놓고는 나중에는 이미 있는 민주당을 깨고 자기가 주도하는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다시 한 번 야권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김대중을 인정할 수 없다. 차라리 조순을 따라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새누리당에 몸을 담더라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던 강경한 입장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어떻게 해도 김대중은 아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은 이후 어디로 가게 되었을까?


김영삼을 따르던 민주화진영의 다수 가운데 일부는 김영삼과 함께 3당합당에 참여하여 민자당에 몸을 담았다. 그에 따르지 않던 나머지 가운데 다시 일부가 한나라다을 창당하는 과정에 조순과 함께 합류하여 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노무현이 집권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한나라당을 뛰쳐나와 다시 합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군사독재의 후신을 용납할 수 없었던 나머지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 선택지는 새정치국민회의밖에 없었지만 김대중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여전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등장했다. 김영삼에 의해 발탁된 재야와 민주화의 흐름이며, 청문회를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까지 얻은, 무엇보다 기존의 새천년민주당과는 다른 계통에 속한 새로운 후보가.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되자마자 김영삼을 찾아간 것이 괜한 객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하기도 했었다.


아직까지도 제 1야당 안에서 친노와 비노-특히 그 지지자들 사이에 첨예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같은 제 1야당에 몸담고 있지만 결국 그 계통이 서로 달랐던 때문이었다. 김영삼에게 버려지고, 한나라다을 거부했던 민주화의 주류가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떠밀려 새천년민주당에 몸담게 되었다. 그리고 뛰쳐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필연이었다. 87년 김대중의 무리한 판단의 유산이 이렇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친노지지자들에 의해 노무현의 이름이 김대중과 거의 대등하게 거론되는 것도 처음부터 노무현의 역할은 김대중과 경쟁하던 김영삼 대신이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민주화의 유산이 흘러흘러 노무현에게로 갔고, 다시 문재인에게로 흘러갔다. 고작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는 문재인을 중심으로 뭉친 친노가 어느새 다수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뿌리가 깊다.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노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김대중을 계승해야 할 비주류에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안철수는 조금 더 젊은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인맥을 만들었어야 했다. 당의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만에 하나 누군가 김대중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이 나타난다면 제 1야당의 권력구도도 꽤나 재미있을 듯.


어쩌면 그것이 문재인의 한계일지 모른다. 김영삼의 유산을 계승했는데 김대중의 유산까지 물려받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야당이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노무현도 문재인도 하지 못했다. 비주류에서도 인재가 없다.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


한 시대가 다시 한 번 깊이 저물어가는 것을 느끼며 새삼 떠올리게 된다. 나비효과처럼 돌고돌아 한 번의 선택이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그때 내가 더 나이가 많고 이름과 실력이 있었더라면. 나중에 알고 나서 더 안타까웠던 것이 87년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오욕은 뒤로 하고 그저 편히 쉬시길. 역시 미래는 남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직은 먼 길이다. 늦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