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개인의 선과 공적 정의...

까칠부 2016. 1. 11. 06:46

간단한 비유를 들어보자.


두 명의 지휘관이 있다. 한 명은 평생 남에게 싫은 말 한 번 해 본 적 없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 한 적도 없었다. 단, 전쟁에 나가 이끌고 갔던 병력의 상당수를 잃고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한 명은 그야말로 안하무인 오만불손, 거기다 욕심이 많아서 부대비품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청탁을 받고 부당하게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정작 전장에 나가서 대부분의 병력을 보존한 채 승리까지 거두고 있었다.


과연 이 두 명의 지휘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지휘관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두 가지 경우 가운데 청렴하면서 능력도 있는 경우는 빠져 있다.


기업의 임원이다. 한 사람은 법과 사규를 어기는 행동이란 평생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항상 정직했고 성실했으며 올바랐다. 대신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혹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고용인이나 계약을 맺은 거래처의 이익을 최대한 빼앗아 가져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다른 한 사람은 법이든 사규든 마음대로 어기고 금품도 향응도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는 망나니였다. 하지만 회사와 노동자는 공생관계이며, 거래처와도 장기적으로 이익을 나누며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선을 넘지 않으면서 최대한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어느 쪽이 사회적으로 더 훌륭한 인물인가. 개인으로야 분명 전자가 더 훌륭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따진다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비리를 저질러봐야 기껏 몇 백, 몇 천, 많으면 몇 억 수준이다. 그런데 정책 한 번 잘못 집행하면 발생하는 손실이 때로 수십조를 넘어가기도 한다. 하물며 그것이 어떤 신념에 의한 것도 아닌 단지 보스의 명령이라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주어야 할까.


정치인의 정체성이란 곧 정치인 자신이 가진 이념이고 신념이다. 정책이고 지향이다. 개인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훌륭한다는 나중 문제다. 결국은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더불어 도덕성까지 훌륭하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무엇이 우선일까?


그릇론이란 것이 있었다. 신하란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군주가 쓰기에 따라 독도 되고 약도 된다. 잘못된 군주를 만난다면 단지 학살의 도구가 될 뿐이고, 훌륭한 군주를 만난다면 천하를 구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개인을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단위로 여기지 않는다. 개인의 정체성보다 그를 쓰는 주군의 그릇을 따지려 한다.


역시 인물론이 가지는 한계다. 어찌되었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면 된다. 국민을 위해 바른 정치를 하면 된다. 그런데 그 바른 정치란 것이 과연 어떤 정치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념이다. 그것이 지향이다. 그것을 배제한다. 과거의 전력을 무시한다. 도덕성과 능력만 있다면 그는 훌륭한 인재다.


원래 이념적 지향이 그런 것이라 여기고 싶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영입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차라리 덜 비참하고 덜 비루하다. 개인의 비리는 안되지만 이념적 정책적 지향의 문제는 상관없다. 이념을 초월한다. 둘 중 하나다. 이념의 차이마저 용납하지 않으려는 독재자거나, 아니면 그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이거나.


역시 과거 노빠들에게 듣던 이야기다. 이념보다는 국민이다. 여러 정책적 오류들을 정당화하며 하던 말들이다. 인물들의 도덕성과 관련해서 항상 항변하던 이야기들이다. 다시 지금에 와서 듣는다. 


4대강마저 그저 다름일 뿐이라. 항상 말한다. 저들은 야권이 아니라고. 새삼 확인한다. 4대강은 그저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이념적인 차이가 이렇게 벌어져 있다.


새벽부터 재미있다. 정치란 항상 재미있다. 사람이 재미있어진다.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