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내가 그곳에
엄마 보고 싶어 어서 빨리 오세요
아아아 외로운 길 가도가도 끝없는 길 삼만리
이게 처음 방영되었을 때 주제가.
그리고 이것이 이후 다시 같은 KBS에서 재방영되었을 때의 주제가,
대충 비슷하지만 후반부의 가사와 멜로디가 약간 다르다.
엄마가 계신 곳 내가 거깄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 그리워요
언제나 안기던 따뜻한 품에
엄마 어디계세요 엄마 대답해줘요
가도가도 끝없는 길 삼만리
솔직히 내가 기억하는 것은 후자의 주제가다. 어쩔 수 없다. 처음 방영되었을 때 나는 '엄마찾아 삼만리'를 무척 싫어했었으니까.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적이었고 악의 근원이었다.
아마 처음 KBS에서 방영했을 때 일요일 아침시간이었을 텐데 하필 같은 시간에 MBC에서는 은하철도999를 하고 있었다. 남자라면 당연히 우주에 대한 큰 꿈을 가져야지 쩨쩨하게 배타고 아르헨티나가 무엇인가. 아리따운 누님과 우주를 누비며 악당들을 물리치는 것이 남자가 할 일이지 고작 엄마나 찾으며 질질짜는 것은 못난 계집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그 못난 계집아이들이 내 동생이었다.
더구나 어머니까지 동생들 편을 들고 있었다. 일요일 오전 은하철도999를 봐야 하는데 어머니까지 합세하여 동생들은 '엄마찾아삼만리'를 보고 있었고 그 결과 '은하철도999'의 마지막화는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2000년 이후에야 겨우 찾아서 볼 수 있었다. 메텔누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참고로 당시 '은하철도999'는 놀랍게도 이후 재방영되었을 때와 달리 많은 장면들이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좋았던 시절이었다. 무려 아이들 대상의 만화영화에 그림이지만 여자의 누드가 나오고 있었다. 1990년대 재방영되었을 때 누드장면 다 잘라냈더니 방영시간이 한 3분의 1은 짧아진 것 같다.
아무튼 '엄마찾아삼만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원래 '엄마찾아삼만리'는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아니었다. 바로 아랫글에서 쓴 바 있는 '사랑의 학교 쿠오레'에서 담임선생님이 들려준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액자형식으로 들어가 있던 단편이었다. 그러던 것을 1970년대 일본 닛폰애니메이션에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하나로써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완성해 방영함으로써 최소한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한국과 일본에서는 원작을 뛰어넘는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아예 원작인 '쿠오레'와는 상관없이 '엄마찾아삼만리'만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마저 상당할 정도였다.
원래 제목은 '아페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 한 눈에도 아페니니 산맥이 이탈리아에 있는 산맥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리적 이동거리만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포함 거의 25천킬로미터 이상, 원래 우리나라의 리계산법으로는 대충 2.5배 잡으면 되니 63천리 정도 된다. 즉 원래 제목은 '엄마찾아삼만리'가 아니라 반올림해서 '엄마찾아육만리'라 해야 옳다. 일본에서 쓰이는 리는 우리보다 딱 10배정도라서 일본에서 제목은 '엄마찾아삼천리'였다. 뭔 기준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일본에서 '삼천리'라 했으니 그 10배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삼만리'. 역시 기준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만큼 먼 거리를 고작 10살 정도의 소년이 엄마를 찾겠다고 헤매고 돌아다니는 이야기인 셈이다.
지금이야 아르헨티나라고 하면 뭔가 안타까운 느낌이 강하지만 불과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넓고 비옥한 농지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신흥강국 가운데 하나였다. 오히려 이탈리아가 내내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다가 겨우 통일왕국을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은 눈물나는 상황이었다. 경제는 피폐하고, 정치도 사회도 아직 안정되어 있지 않고, 그래서 더욱 당시 동화작가이던 에드몬드 데 아미치스는 자라나는 어린세대들을 위해 '쿠오레'와 같은 희망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써내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장차 이탈리아의 미래가 되어야 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가르치기 위해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오레'자체가 당시 이탈리아의 청년들을 위한 '사랑의 학교'였던 셈이다.
지금도 많은 가난한 나라에서 사람을 가장 요긴한 수출품이다시피 부자나라로 내보내는 것처럼 당시도 가난한 이탈리아에서는 부유한 아르헨티나로 많이들 돈벌러 떠나고 있었다. 70년대 독일로 떠났던 수많은 광부와 간호사들처럼, 80년대 오일달라를 벌어오겠다며 열사의 땅으로 떠나야 했던 수많은 건설노동자들처럼. 이제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돈벌겠다고 한국으로 떠나오고 있다. 지금이야 전화도 있고 인터넷도 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전화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되기 전 그래서 공장이 있는 동네 PC방에 가보면 웹캠을 사용해 인터넷으로 가족과 화상통화를 하는 외국인노동자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늘 가까이 있지 못하기에 더 보고 싶고, 멀리 있어 항상 안부를 전할 수 없기에 더 안부를 묻고 근황을 듣고 싶다. 그런데 편지 한 통 보내는데만 최소 몇 주가 걸리던 당시 가족의 안부를 물으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더구나 가족이 아픈 것을 안다면.
어린 소년 마르코가 멀리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로 어머니를 찾겠다고 길을 나선 이유였다. 지금도 어린아이 혼자 떠나보내기엔 너무 먼 거리다. 하물며 교통도 불편하던 당시 어린아이 혼자 엄마를 찾겠다고 떠나기에는 너무 멀고 험하기만 한 길이다. 그래도 엄마가 아프다니까. 돈벌러 떠났다던 엄마가 병들어 위독하다 하니까. 엄마가 보고 싶다. 병든 엄마를 가까이서 지키고 싶다. 아마 돈벌러 멀리 떠난 부모를 가진 아이들이 가지는 공통된 마음인지도 모른다. 고작 다리 하나 건너였고, 어린 걸음에도 한 시간도 채 걷지 않아도 되는 정도였지만, 그러나 옆동네에서 일하던 엄마와의 거리가 어린 시절의 내게도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동생들과 셋이서 좁고 어두운 방안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을 때 어린 마음에 느꼈을 고립감과 절망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어디에도 기대고 매달릴 따뜻하고 든든한 품이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그 거리가 수천수만킬로미터가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엄마를 찾아서 떠나고 싶었던 많은 아이들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보내고 남아있던 당시의 수많은 이탈리아인들 자신들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음에도 현실의 이유 때문에 남아있어야만 했던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난해서 돈벌어보겠다고 그 먼길을 떠났는데 그곳에서의 삶이 순탄할 리 없다. 그나마 이야기속 마르코의 어머니는 운이 좋은 경우다. 당장 한국에서만도 그나마 돈 얼마 더 벌어보겠다고 떠나왔다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혹한 일들을 겪어야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고, 대단한 기술도 없고, 더구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신세고, 그래서 이리채이고 저리치이며 여러곳을 전전하기 쉬웠다. 돈도 제대로 못받고,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며 먼 타지를 오로지 돈벌겠다는 의지 하나로 떠돌게 된다. 그래서 멀리 돈벌러 가서 소식이 끊기고 끝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아마 어머니가 '엄마찾아삼만리'를 동생들과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도 돈벌겠다고 국민학교만 마치고 집을 나섰다가 몇 년을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이모부가 외삼촌이 있는 곳을 찾기까지 몇 곳이나 직장을 옮기며 많은 일들을 겪고 있었다. 월급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사장이 야반도주하고 혼자 남아 빚쟁이들에 시달리고, 그러고 어느새 나이를 먹고 몸은 지쳐간다. 어머니도 그렇게 어려서 벌써 돈벌겠다고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일을 해야 했던 경우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란 거의 거기서 거기인 셈이다. 자식을 두고 돈벌러 멀리 아르헨티나로 떠나온 엄마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엄마를 찾겠다고 먼 길을 혼자서 떠난 마르코의 마음이었을까?
애니메이션의 감독은 먹는 장면 만큼은 진짜 지독하게 잘만드는 다카하타 이사오였다. 스태프로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참여했다. 그래서 역시나 TV애니메이션치고 때깔도 좋고 무엇보다 먹는 장면이 맛깔나다. 조연들도 꽤 다양하고 개성적이어서 49회라는 분량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지나간다. 역시 그래도 그때는 '은하철도999'를 봐야 했었다는 생각 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메텔누님과 꼬맹이 마르코와의 사이에서 고민이란 무의미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이 그냥 쓰레기다. 돈벌러 떠난 엄마를 찾는 것이 아닌 고아가 부자인 엄마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대충 '엄마찾아삼만리'와 '집없는 소년'을 섞어놓은 이야기라 보면 된다. 더불어 그보다 훨씬 전인 1950년대 김종래라는 만화가가 같은 제목의 만화책을 냈던 적이 있는데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내용이었다. 아빠가 팔아넘긴 엄마를 아들이 찾아나서는 이야기였으니 더 참혹할까. 나도 본 적은 없다.
아름답고 그리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서 오히려 지금 보고 있으려면 불편해지는 만화영화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었을 때가 좋았다. 벌써 이만큼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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