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사람들의 눈은 거의 지나온 과거를 형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너무 지쳐서 더이상 걸음이 떼어지지 않을 때도 눈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지나온 산길 아래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 여긲지 왔을까. 무엇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혹시라도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후회라 부르고 미련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주저앉아 과거의 기억속에 머물며 살아간다.
힘들었을 것이다. 지쳤을 것이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길이었지만 너무 힘들고 외롭고 고단한 길이었다.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차라리 그때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갑작스런 동료들의 죽음이 그녀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최소한 그 자리에 멈춰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끔 만들었다. 그때 자기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었다. 자기에게는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만일 그때 자기가 그 길을 선택했더라면. 어차피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고단함도 괴로움도 없는 그곳은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준다. 힘겨운 고개를 잠시 기대 쉴 수 있었던 옛사랑 김사부(한석규 분)의 어깨처럼. 그때처럼 잠시나 마음놓고 지친 자신을 쉴 수 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덧 김사부도 그런 나이가 되었다. 자신의 앞날보다 자신을 뒤쫓아오는 후배들의 앞날이 더 기대되고 보람차다.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보다 자신을 뒤쫓아 달려오는 후배들의 미래를 그려보며 흐뭇해한다. 앞으로 얼마나 언제까지 더 가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보다 이미 지나왔기에 훤히 보이는 후배들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그만큼 여전히 자신의 앞에 남아있는 이 길이 힘겹고 부담스러운 탓이다. 그래서 더 쉽고 편한 대상에 눈길을 돌린다. 오래전 추억이 각별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잠시의 위로였다. 잠시의 휴식이었다. 그것을 서로가 알았다. 그래서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었고 기꺼이 빌려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연인이라기보다는 오랜 친구와 같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더 깊이 이해했기에 어쩌면 함께할 수 없었던 역설이기도 하다. 자신만을 고집할수도 없었고 강요할수도 없었다. 그런다고 그대로 따라올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무엇보다 자기의 존재가 상대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자신으로 인해 혹시나 상대가 원래의 자신의 모습과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사랑했었다. 바로 어제 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그대로 다시 원래 자신의 길로 돌아가려 한다. 그모습을 굳이 김사부는 따라가 지켜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었구나. 픽션이지만.
차라리 더이상 내가 내가 아니게 되더라도 상대와 함께하겠다. 상대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어도 함께있는 순간들이 자신에게는 오로지 행복이다.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한다. 오래전 부용주도 이영주도 서로가 떠나는 것을 용납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했지만 강동주(유연석 분)는 아니었다. 괜히 그들을 흉내내려는 윤서정(서현진 분)에게 핀잔까지 준다. 자신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만일 떠난다면 둘이 함께여야 한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있는 지금의 순간이 강동주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행복이다. 그래도 결국 잠시의 휴식 끝에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서로의 등을 든든히 지켜주며. 누가 옳다 그르다 누가 더 낫다 못하다 말할 것 업는 자신의 선택이다. 만에하나 과거 부용주와 이영주가 강동주와 같은 선택을 했다고 지금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이 없었을까. 그냥 선택이 달랐던 것 뿐이다.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 지금껏 힘겹게 견디며 헤쳐온 것이다. 보상과도 같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난다.
장기시리즈로도 괜찮을 듯하다. 특히 병원사람들 하나하나가 분명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큰 사건 없이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끌린다. 김사부가 어떤 미모의 여성과 만나고 있다. 김사부의 첫사랑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라면 익기만 기다리다가 몇 입 먹지도 못하고 바로 훔쳐보려 뛰쳐나가고 만다. 심각한 표정의 강동주는 물론 냉소적이던 도인범(양세종 분)까지 예외가 없다. 원래 남의 사랑이야기는 자다가도 일어나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수술대에 누워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하는 것이다. 뜻밖에 무거운 주제가 가볍고 유쾌한 일상위에 실린다.
의사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그것이 어디이든.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이든. 어떤 조건에 있든. 내가 의사고 환자가 앞에 있다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기가 너무 어렵다. 일상을 부수며 등장해서 다시 자신들의 일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의사로서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의료인으로서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모두가 꺼려하는 수술이지만 도인범까지 나서서 훌륭히 마무리한다. 총상환자는 도인범이 나설 자리를 만들어주고 이영주를 통해 또다른 의사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장소에서 그들은 의사로서 환자를 살린다.
멈춰서지 않는다. 잠시 멈추더라도 주저앉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어차피 돌아가지도 못한다. 지금 선택한다. 오래전 그날 이미 선택했다. 자신의 길을 간다. 아직 강동주와 윤서정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끝난 이야기처럼 이영주의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자신들만이 아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심만이 그 먼 공간을 채운다.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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