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아마 아직 IMF 전이었지 싶다. 그때 우연히 만화방에서 심상찮은 만화책 한 권을 집어들게 되었다. 원래 요리만화같은 건 전혀 보지 않았는데 그 만화는 유난히 끌렸다. 그림부터 무척 개성이 강했던 요리대결만화의 걸적이라기보다 괴작 '철냄비 짱'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이 고타니가 주도하여 열린 중화요리대회의 결승에서 아키야마 짱이 선보인 도삭면과 피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도삭면은 정말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면반죽을 통째로 들고 칼로 도려내어 국수를 만든다는 자체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담한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인 심사위원들까지 놀라고 감탄할 정도라면 어쩌면 중국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기술은 아니었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몇 년 전까지 대림동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대림동은 내가 살기 시작한 무렵부터 중국인의 유입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PC방이라고 들어갔더니 한국윈도우가 하나도 안깔린 경우마저 있었다. 알바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길가다 아무 분식집에서 만두를 사먹으면 만두에서 기묘한 향이 느껴지고는 했었다. 나중에 그것이 샹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동네라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면 각족 중국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바로 거기서 도삭면을 봤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만화책만 읽고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요리만화라는 게 두고두고 읽으면서 반추하라고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김풍이 말한 것처럼 만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요리들은 단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길가다 우연히 본 풍경에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냥 한두가게가 아니었다. 밀가루로 만든 식사 및 간식거리를 파는 모든 가게에서 남자인 주방장들이 한결같이 만들고 있던 것이 바로 도삭면이었다. 반죽덩어리를 다 도려내고 스텐레스 심만 남은 것도 보았다. 아, 이게 만화에서처럼 그렇게 대단하거나 특별한 기술은 아니구나. 그냥 중국요리 기술이구나.
그리고 또 하나 대림동에 살면서 깨달은 것이 중국요리 가운데 수타면手打麵과 라면拉麵의 차이였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수타면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정작 라면(拉은 원래 납이라 읽는데 중국에서는 라로 읽는다)이라 부른다. 특히 한국에서는 면반죽을 내리치며 면을 뽑는 반면 중국에서는 글자 그대로 접어서 늘여 면을 만든다. 역시나 요리만화를 보면서 느낀 궁금증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인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좋아하는 쫄깃한 식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손으로 면을 쳐서 뽑으면서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식감의 면을 만들 수 있을 것일까. 그냥 면뽑는 방법이 다른 것이었다.
면반죽이 살짝 묽다. 그래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죽죽 늘어난다. 대개 여자들이 많이 한다. 즉석에서 밀가루를 덜고 그 위에 물을 부어 반죽을 시작하더니 바로 죽죽 늘여 면을 뽑아낸다. 내리치는 기술은 한국과 일본에서 탄력이 강한 이른바 쫄깃한 면을 좋아하니 그렇게 개량된 방식인 듯. 그래서 수타면이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라면이고. 참고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무 동네 중국음식점에 가더라도 주방장이 직접 면뽑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탕탕 내리치면서 면을 뽑는데 흉내내봐도 절대 안되더라. 오래전 이야기다. 바로 주방이 보이는 창이 있던 동네중국집 옆에 양말공장도 있었는데.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대림동 살 때 중국식 전병이나 호떡, 월병, 꽈배기 등등 진짜 많이 사먹었는데. 꽤 맛있다. 가격도 싸고 배도 부르고 한 끼 때우기 딱이다. 얼마전 전병 먹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중국전병이 아닌 메밀전병이라 얼마나 실망했었는지. 그냥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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