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만화를 주간연재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는 가혹한 일이다. 일주일동안 스토리 구상하고, 콘티 짜고, 원고를 완성해야 한다. 대개 최소연재분량이 16페이지 내외, 인기있는 작품들은 그 2배 넘는 분량을 완성해서 실어야 한다. 단순한 만화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복잡하고 정교한 극화체라면 진짜 죽어나는 것이다. 괜히 점프 만화가 가운데 건강이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일주일 내내 책상앞에만 앉아서 쉬는 날도 없이 만화만 그리고 있으니 몸이라고 멀쩡할 리 없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스포츠만화는 난이도가 높다. 다른 장르의 만화들은 그나마 정적인 장면이 많거나, 격렬한 액션이 있어도 대충 상상력으로 채워넣으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니더라도 적당히 화실의 구성원 가운데 모델이 되어 직접 동작을 취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그런 식으로 그리기에는 너무나 대중들에 노출되어 있다. 어설프게 그리면 바로 표가 난다. 그러면서도 실제와 같은 박진감이나 역동성을 느끼게 하려면 결국 실제의 스포츠경기를 참고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게임당 수십분 이상 걸리는 스포츠경기에서 어떤 장면을 만화에 쓸 것인가를 결정하려 해도 경기 전체를 몇 번이나 반복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름대로 꼼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얼굴만 나오는 클로즈업이나, 아니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작들만으로 만화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구는 최고다. 선수들끼리 뒤엉키는 장면이 거의 없다.
괜히 순정만화 가운데 주간연재가 아예 없다시피 한 것이 아니다. 순정만화는 특히 캐릭터의 비중이 높다. 다른 건 다 어시스턴트에게 맡겨도 캐릭터까지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렸다가는 바로 표가 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공장제만화의 초기에는 최소한 주인공 얼굴 정도는 작가가 직접 그리는 것이 암묵적 룰처럼 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독자에 대한 성의인 것이다. 주요캐릭터라면 거의 작가가 직접 그려야 하는데 한 회 연재분량을 직접 작가가 다 그리려 했다가는 자칫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만화에서도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이 상당히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하고는 한다. 마치 그림솜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몇 페이지에 걸쳐 어시스턴트들이 대부분 담당하는 정교한 그림으로 채우고 작가가 책임져야 하는 캐릭터는 최소한으로 한정한다. 얼굴만 클로즈업하거나, 아니면 썼던 장면을 다시 복사해서 붙이거나, 신체의 일부만을 등장시키거나. 연출의 기법이기도 한데, 원래 영화에서도 제작비를 아끼려고 이런 식으로 연출을 사용해 관객에게 보이는 장면을 제한하기도 한다. 보여줄 수 있는 장면만 보여준다.
그래서다. 농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팀당 5명 씩 10명이나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마치 격투기를 보는 듯 좁은 공간에서 선수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경우가 많다. 그냥 손에 익은 관성대로 그릴 수 있는 장면들도 있지만 역시 결정적인 장면들은 실제의 경기장면을 참고하여 그릴 수밖에 없다. 더 역동적이고 더 인상적이며 한 편으로 매우 사실적인 경기의 장면을 그대로 만화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바로 앞서 이야기한 그 부분들이 적용된다. 한정된 시간과 부담스런 작업량, 더구나 스포츠란 자체가 주요캐릭터들이 직접 경기장에서 뒤엉키는 장면이 많다 보니 작가의 부담도 따라서 커진다. 결국은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지금 그리고 있는 또다른 농구만화 '리얼'이 격주간지에 부정기적으로 연재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대로 스포츠만화를 - 아니 만화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주간지 연재로는 불가능하다.
만화 '바쿠만'에서도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한때 주간지 연재를 목표로 한 번 원고를 완성해보려 도전한 적이 있었다.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사흘이 지나도록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데 겨우 떠올라도 나머지 나흘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그나마 아마추어라 도와줄 어시스턴트도 없었다. 쉬는 날도 없이 거의 매일같이 야근에, 철야에, 오죽흐면 주간연재되는 많은 만화들에서 작가가 자기가 썼던 설정마저 잊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일어나기도 한다. 정작 자기가 쓴 스토리이고 만든 설정인데도 워낙 시간에 쫓기며 만화를 그리다 보니 심지어 어떤 캐릭터가 있었다는 사실마저 나중에는 잊고 만다. 원래 자기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새면서 알아서 자멸하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욕먹는 '토가시'도 덕분에 허리가 나가서 만화를 못그리고 있을 텐데.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단지 변명일 수도 있다. 밤을 새워서라도 트레이싱같은 것 말고 직접 취재하거나 상상해서 만화를 그렸어야만 했다. 그런 만화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만화들은 정작 슬램덩크만한 역동성과 현실감을 보여주지 못한다. 실제의 경기를 보는 듯한 현장감도 느끼게 하지 못한다. 너무 욕심이 컸다. 그보다는 원래 주간지에 연재되어서는 안되는 만화였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다시는 주간지연재를 않으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점프출신 가운데서도 그런 극한의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경우가 적지 않다. 그나마 돈이라도 많이 버니 다행이지 원고료만으로는 사실 생활도 안되는 극한의 직업이라.
그냥 '슬램덩크' 트레이싱 논란이라는 게 있기에 한 번 써봤다. 원래 당시까지만 해도 그런 정도는 용인되는 수준이었던 터라. 그보다 직접 만화를 보고 베끼지 않는 이상 사진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이노우에 다케히코이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는 느낌마저 있다. 원래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일이었는데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유명세가 해서는 안되는 극악의 범죄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확실히 다시는 '슬램덩크'같은 만화는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주간연재만화란. 허리가 아파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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