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사랑하는데 폭력을 쓴다. 학대당하는 동물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사람을 상대로는 서슴없이 폭력을 사용한다. 어째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니까.
미자(안서현 분)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낸시(틸다 스윈튼 분)에게 금돼지를 건네며 거래를 제안한 것과 같다. 금돼지의 가치가 옥자를 산 채로 넘겨주기에 충분하다 여겨지자 이제까지 냉정하던 내시의 표정에 웃음이 감돈다. 돈이 언어인 상대에게는 돈을, 폭력이 언어인 상대에게는 폭력을. ALF의 우스꽝스러움은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다국적기업 미란도의 거대함에 비례한다. 심지어 뉴욕경찰의 묵인 아래 사설경비조직인 블랙초크를 투입하여 ALF의 조직원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뉴욕에서, 그리고 사육장과 도축장에서도 옥자를 비롯한 슈퍼돼지들을 상대로 무심한 폭력들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심지어 동물을 사랑한다는 동물학자 조지(제이크 질렌할 분)까지 그에 가담하고 있었다. 개인의 사정이었다. 동료들 앞에서 어떻게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하든 그것은 옥자와 전혀 상관없는 단지 개인의 사정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몇 년 전 미국의 도축업체들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직원들이 개인의 스트레스를 도축당하는 동물들에 풀려 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실들이 눈에 보이고 자신이 알게 되면 사람들은 기꺼이 분노한다. 하지만 대부분 굳이 알려고도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단지 고기가 얼마나 싸고 맛이 있는가.
루시와 낸시는 그같은 기업들의 양면적 속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마치 대중을 생각하는 것처럼. 대중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대중의 여론에 신경쓰는 것처럼. 하지만 화려한 퍼포먼스 뒤에 감춰진 것은 섬뜩하도록 냉정한 자본의 이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중이 분노하고 반발하자 아예 그런 대중을 무시해 버린다. 자본이 가진 힘으로 모든 절차를 완료하고 단지 더 싼 값에 대중을 유혹하고 설득하려 한다. 그리고 대부분 대중들은 그렇게 넘어가고 만다. 개인은 현명해도 대중은 어리석다. 다만 철저히 자본의 이익에만 충실한 낸시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개인으로서 그녀의 앞에 선 미자의 제안이었다. 대중의 이름 뒤에, ALF라는 그림자 뒤에 숨은 제이와 케이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었다.
한 편으로 ALF는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로부터 소외된 낙오자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째서 하필 김군(최우식 분)이었을까? 운전면허증은 있는데 4대보험은 없다. 명색이 미란도의 직원인데 급여나 대우나 하나같이 소속감을 가지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 뿐이다. 내 일이 아니니까. 어차피 미란도의 일일 뿐이니까. 아마 해고되었을 것이다. 그 불만이 미란도에 대한 분노로 ALF에 대한 동의로 이어진다. ALF의 이상이나 신념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면서 단지 미란도에 손해를 입힐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영화의 핵심은 생명이 아닌 단지 재산으로서, 사물로서 다루어지는 돼지들의 존재일 것이다. 어느 정도 지능도 있다. 옥자 역시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미자를 구하기 위해 절벽에 튀어나온 나무를 이용할 줄 알았다. 사육장에서 만난 이름도 모르는 돼지들 역시 자신들의 새끼를 구하기 위해 애써 우리를 열고 옥자에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지 고기에 지나지 않았다. 미자와 옥자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든 죽여서 가공한 다음 포장해 파는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런 악의조차 없이 무심하게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들이 그 무심한 논리를 섬뜩하도록 냉정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돼지들을 악의없이 죽임을 당하고 아무 감정없이 가공되어 시장에 유통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돼지고기를 먹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말을 후반의 사육장과 도축장을 보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동안 돼지고기를 직접 요리해 먹으면서도 그것이 바로 얼마전까지 살아 숨쉬던 어느 돼지의 살덩이임을 인지하고 먹어왔던 나로서는 그다지 크게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사람은 고기를 먹는다. 살아있는 무언가를 죽여 그것을 먹는다. 미자도 닭을 죽여서 그 고기를 끓인 백숙을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동물을 죽이고 고기를 먹는 사소한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럼에도 어떻게 동물을 죽이고 어떤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자기가 지금 먹고 있는 고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잠시라도 인간을 위해 희생된 동물들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마지막은 작지만 구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작 옥자 하나 구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수없이 많은 옥자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오로지 옥자만을 구해 빠져나올 수 있을 뿐이었다. 무력감과 자괴감마저 느끼는 가운데 아마도 아비와 어미인 듯한 슈퍼돼지들이 어린 새끼를 미자와 옥자에게 건넨다. 옥자는 그 새끼를 입안에 넣고 모른 척 사육장을 빠져나온다. 다시 원래 있던 집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인간과 친구인 채로 마음껏 자연속을 뛰어놀던 미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과연 그곳에서 옥자와 어린 새끼는 영원토록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인간은 결국 나이를 먹고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이 참 못됐다.
그냥 만화라 생각하면 된다. 그냥 세상에 대한 단지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요소들을 단순화시킨다. 단순화시켜 특징들을 강조한다. 기괴하게 비틀린 캐릭터들이다. 때로 우습고 때로 황당하고 때로 비현실적인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세상의 표상이다. 논리로 이해하는 영화는 아니다. 심상으로 공감하는 영화다.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 그 차이가 논란의 이유가 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액션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옥자를 찾으며 보여준 액션만으로 그 값은 충분히 했다 여겨진다. 그보다는 인간의 이야기였다. 어느 낯선 여행자가 들려주는 어딘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워낙 혹평이 많아 주저했다. 정확히 그래서 더 보고싶어진 것이었다.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고 앉았는 것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 큰 고역이기도 하다. 인상깊었다. 극장에서 봤으면 더 재미있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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