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명불허전 - 수백년의 과거와 현재,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들

까칠부 2017. 9. 10. 06:39

선의만으로 살기에는 너무 각박한 세상이다. 이미 귀족의 시대가 끝난 순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단지 귀족이 부르주아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을. 고귀한 혈통을 그보다 더 신성한 자본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귀족보다 더 귀하고 더 신성한 새로운 지배계급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유전무죄무전유죄를 외치며 자살한 탈옥수가 있었다. 탈옥수가 외친 그 한 마디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곧 신분이고 돈이 곧 권력이라는 것을. 아니 어차피 돈이 권력을 부르고 권력이 돈을 끌어들이기에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시피하다.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신분과 지위 역사 상속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근대화된 자본주의사회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사회인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러고보면 조선과 현대의 캐스팅이 중복되어 있다. 현대의 인물이 조선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나오고 조선의 인물 역시 현대에서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다.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무려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만큼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변화와 발전이 있었지만 그래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얼마나 바뀌기는 했던 것일까? 특별한 지위에 있는 만큼 특별한 권리를 누리고 싶다. 남들보다 높고 귀한 신분에 있는 만큼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것들을 누리고 싶다. 그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나누어받는다. 조선에서도 그렇게 살았고 현대에도 그렇게 살고 있다. 수백년의 시간을 넘나들면서도 한 가지 남는 진실은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런 세상에 자신은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결국은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이유다. 만나고 서로 엇갈리고 오해하고 멀어지다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해피엔드인지는 모르겠다. 해피엔드라고 그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하는 흔한 결말은 아닐지 모른다. 어찌되었거나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두 남녀가 운명적으로 만났고 서로에게 이끌리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당히 심오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선의 신분제도와 현대의 계급이라는 현실, 그리고 한 편으로 기술자로서 그에 봉사하는 의사의 존재라는 것도. 모든 환자를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연 현실이 그러한가.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경찰이든 검찰이든 판사든 어떤 직업이든.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만남일지 모르겠다. 수백년 전 조선의 야만적인 현실과 현대의 우리가 믿고 있는 이상과의 갈등이다.


사실 말이 안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조선에는 필로폰이나 코카인과 같은 현대의 다양한 마약들이 없었다. 마약마다 작용기전도 다르고 증상도 다 다르다. 그런데 아편중독을 기준으로 단지 침만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상업드라마니까. 그런 세세한 부분들은 그저 사소한 주변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허임이 수백년 전 과거에서 왔지만 현대의 어느 한의사보다도 뛰어난 침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도 재능과 실력으로 인정받는 최연경(김아중 분)과도 대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한의학이 수백년동안 그정도 발전도 없었을까?


최연경이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허임이 결코 잊지 못하는 과거가 그의 현재를 옭아매듯 최연경 자신이 기억조차 못하는 과거의 기억이 그녀를 옭죄고 있다. 어떤 변수가 있을까? 그리고 허임이 치료하면서 보았던 환자들에게서 허임은 무엇을 느끼고 마침내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 먼 길을 돌아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날 것인가는 작가의 몫이기는 하다.


어쩌면 조건반사같은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도 허임의 행동을 결정한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틀린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하필 그 여자가 있다. 자꾸만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녀가 있다. 날카로운 칼로 베어내는 것은 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한 번 더 관계가 비틀린다.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