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를 미망인이라 불렀다. 따라죽지 못한 여자라는 뜻이다.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다. 하긴 지금도 어디선가는 남편이 죽으면 장례식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아내까지 함께 죽여 장례식을 치르는 문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때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못하고 살아 평생 그것이 죄가 되어 자신을 따라다닌다. 살아있다는 것이 죄가 되고 지우지 못할 낙인이 된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그러지 않았으면, 혹은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우연이 필연이 된다. 그냥 스쳐지나간 일상들마저 의미를 가지고 다시 선명히 떠오른다. 그만큼 큰 일이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일이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받아들이려 이런저런 이유를 찾아나서는 때문이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내가 그래서는 아닐까? 하다못해 딸이 돌상에서 실을 집은 것을 마이크로 바꿔준 것마저도. 그렇게 어이없이 죽을 것이었으면 살았을 때 더 잘해줄 것을. 더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 둘 것을.
그만큼 비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푹 패인 듯 한 사람의 존재만큼 사라져버린 시간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아직 살아있었으면. 아무일없이 살아서 멀쩡히 자라 있었더라면. 그저 좋게만 생각하고 싶다. 잘 되었을 것이라고. 잘 살았을 것이라고. 그래서 상실감은 더 크다. 어째서 그는 그때 그렇게 죽어서 그 좋은 것들을 누려보지 못한 것일까?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슬픔은 크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아픔도 깊다. 그런에도 자신은 살아야 한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시간이 아닌 자신의 시간을 잃어야 했다. 자신이 꿈꾸던 시간들이 좌절과 절망의 기억으로 대신 채워져 있다.
살아있기에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살아있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을 추억하며, 그래서 살아가는 내내 죽은 사람과 함께 한다. 망각이란 축복이다. 잊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잊을 수조차 없는 죽음이 평생을 구속처럼 자신을 따라다닌다. 하물며 자기로 인해 죽었다면. 자기가 살리지 못해 죽고 말았다면. 자기 때문이라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인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애써 잊으려 하고 애써 도망치려 하고 혹은 속죄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속이려 하기도 한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만큼 자신의 죄는 더 지독히 자신을 따라다니게 된다. 잊지 못하는 만큼 살아있다는 자체가 지옥이 된다. 이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을까?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에 의해서.
단순히 피해자인 하문수(원진아 분)와 이강두(이준호 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들 자신도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어 있다. 사고로 잃은 동생과 그로 인해 불행해진 가족에 대한 죄책감속에 살고 있다. 자신과 사고장소에서 약속을 했던 탓에 죽음마저 잊혀진 첫사랑에 대한 죄책감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살아 있는 그를 외면했었다. 살아있는 것을 알면서 외면하고 혼자서만 살았다. 그를 죽도록 버려두었었다. 그래서 더 슬픈 것이다. 그냥 피해자이기만 했다면 가해자를 욕하며 원망하며 살았으면 괜찮았을 것을.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선의이기에 그 선함이 진저리쳐지도록 아프고 슬픈 것이다.
서주원(이기우 분)이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사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고의 책임을 모두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전혀 막지도 지키지도 못했었다. 오히려 혼자서 도망쳐야만 했었다. 아버지의 무고함을 증명해야 한다. 아버지에게 아무 잘못도 없었음을 자신이 입증해야만 한다. 아버지의 대신이다.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속죄였다. 당연히 어머니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아내로서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더이상 아버지의 아내가 아니라 한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마냥 울며 헤매는 수밖에 없다. 그런 서주원을 또 정유진(강한나 분)은 아픔으로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설득으로 서주원의 아버지가 사고의 책임을 모두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못이기고 세상의 비난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었다. 서주원이 도망칠 때 정유진 역시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차라리 함께 감당했어야 했는데. 어떤 비난을 듣고 그것이 상처가 되었더라도 곁에서 함께 감당했어야 했을 텐데. 과연 정유진은 서주원을 아직도 남자로써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그에게 집착케 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이 비틀린 서로의 사이가 서럽고 슬프기만 하다. 하지만 약해질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정유택(태인호 분)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어떤 상처와 아픔이 감춰져 있을까? 정유택이 마치 인간불신에 빠진 사람마냥 끊임없이 주위를 의심하며 돈을 매개로 한 마담 마리(윤세아 분)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모두가 자신의 돈을 노린다. 모두가 자신의 지위와 재산만을 노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오만할 정도로 거침없는 모습에 비해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냥 악역이라기에는 그동안 너무 많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히려 열쇠가 되지 않을까. 이 모든 아픔과 갈등을 해결할 열쇠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모른다.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다시 사랑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냥 사랑만 하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묻고 다시 자유로워진 채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사적인 것이다. 아등바등 필사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좋은 이유다. 넘치지 않게 그렇다고 모자르지도 않게 그러나 사람답게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일상의 평범한 웃음들이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아픔들을 대신한다. 어쩌면 서로 함께 하는 동안 자신도 남들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 괜찮아질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은 평범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은 원진아가 예뻐서 보기 시작한 드라마였는데. 우연히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고르다가 자그마하고 예쁜 표정을 짓는 여자가 보이길래 채널을 고정했다가 지금까지 빠져들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느껴지는 드라마다. 대단한 사람들이 아닌 상처의 숲을 헤치며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 대한 평범한 인간적인 연민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여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럼에도 그들이 가진 꿈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서도.
조금 더 본격화될지 모르겠다. 공사현장을 두고 갈등이 불거진다. 공사현장에서 일어나는 부조리가 결국 과거의 사고와 이어진다. 지하에 아직 매립된 폐기물이 있다. 땅속에 빈 공간이 있다. 하문수가 잊은 기억은 이강두 자신이 잊고 싶은 자신의 죄이기도 하다. 이강두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풀어야 할 족쇄다. 영원히 치유할 수는 없다. 단지 잊을 수는 있다. 그만한 이유만 주어진다면. 끝이 바로 시작이다. 남은 감정 속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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