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고스란히 남는다. 다만 괜찮아질 뿐이다. 생각날 만큼 아프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잊을 수 있다. 아주 오랜 어릴적 기억처럼. 한때는 소중했을 지난 시간들처럼. 문득 상처를 보면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머리에 기억대신 남은 상처처럼.
어쩌면 그래서 사랑을 하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처도 잊을 만큼 뜨겁게. 아픔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간절하게. 무엇보다 그 모든 보상을 대신할 만큼 행복하게. 그러면 설사 치유되지 않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상처와 아픔이 남아있는 채로 다시 일상을 살아갈 용기와 힘도 낼 수 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상처도 아픔도 잊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더 크고 무겁고 두렵고 설레고 아프고 기쁘고 저린 소중한 순간들이 그런 사소한 상처 쯤은 잊을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한 마디면 된다.
"괜찮아."
"넌 괜찮아."
"넌 아무 잘못도 없어."
"넌 잘하고 있어."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저 위로에 불과할지라도. 단지 의례적인 무성의한 한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크게 위로가 된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버릇처럼 자학에 빠져드는 순간 하문수(원진아 분)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이강두(이준호 분)의 표정이 달라지고, 굳이 버스까지 그냥 보내며 하문수 역시 이강두에게 자신의 오랜 비밀을 털어놓았던 것이었다. 혹시 누군가 알새라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비밀을 자신의 손을 잡은 이강두의 체온에 기대어 조심스레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강두는 괜찮다 말해준다. 그 한 마디를 그동안 간절히 듣고 싶어 했었다.
이강두가 감추고 있던 진실과 마주한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건물붕괴로 동생이 죽고 그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모두가 고통속에 살고 있는데 건설자재를 빼돌린 사람의 아들을 용서하고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이강두에게 필요했던 것도 괜찮다는 한 마디였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하문수의 네 잘못이 아니라는 한 마디였을 것이다. 돌아가 붙잡아 주었다면. 뒤돌아서 다시 그를 끌어안아 주었더라면. 거기서 두 사람의 걸음이 엇갈린다. 이강두는 끝끝내 하문수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아니 용서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이강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설사 이강두의 아버지가 당시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자신은 이강두를 사랑할 수 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상처처럼 그 사랑에 묻혀 잊혀지는 것 뿐이다. 딱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사소한 일들이 되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큰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다. 자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이강두에 대해서가 아닌 자신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은 그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결심은 늦었고 이번에는 이강두가 자신에 대한 불신과 의심으로 하문수에게서 도망치고 만다. 하필 하문수에게 전한 그 자리에 서주원(이기우 분)이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서주원이 하문수에 대해 가진 감정을 이미 알고 있다. 하문수 또한 한때 서주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하문수에게서 용서받지 못했다고 하는 자각이 그의 오랜 열등감을 들쑤신다. 과연 자신이 하문수로부터 용서받는다고 그녀의 곁에 남아있을 자격이 있을까? 도망치기 좋은 핑계다. 사실은 하문수와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하문수의 곁에서 그녀의 용서와 사랑을 구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비겁하다기보다는 나약할 수밖에 없는 서툰 초상들인 것이다. 그렇게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많은 이들이 후회와 미련을 남긴다.
그러니까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이강두를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이다. 서주원과 정유진(강한나 분)의 사이를 갈라놓은 악연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정유택(태인호 분)의 방황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무심코 정유진도 서주원 앞에서 정유택을 인정하고 있었다. 오빠 정유택 앞에서는 일부러 상처주려는 듯 독한 말을 내뱉더니 정작 서주원 앞에서 그를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마담 마리(윤세아 분)에게 의지해 위로받으려는 나약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고 사랑받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그보다는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진다. 사랑이라는 간절함과 소중함이 다른 것들을 사소한 일들로 만들고 만다. 나라도, 민족도, 인종도, 가문도, 신분이며 계급의 차이마저 아랑곳않는 사랑의 무모하고 맹목적인 속성이 그래서 연인들에게 구원이 되어 준다. 그 어느 것보다 사랑만이 가치있고 의미있다. 이렇게 멋대로 꼬여버린 운명 속에 그들이 기대할 단 하나의 구원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찾고 사랑에 기대어 사랑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심지어 그를 위해 돈의 힘까지 빌린다. 돈으로 사서라도 자신에게 무릎과 손을 빌려줄 사람을 찾는다.
너무 앞서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많은 사람은 필요 없다. 한 사람이면 된다. 단 한 사람만 자신을 똑바로 보아주면 된다. 부모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혹은 형제거나 친구일 수도 있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것은 연인일 것이다. 단 한 사람이다. 모두를 대신할 수 있는 오로지 한 사람이면 된다. 그가 중심인 세상은 오로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컨테이너 트레일러에 올라 환한 웃음을 짓는 하문수의 모습이 천진하고 해맑다. 이강두를 보면서도 아버지가 눈치챌 만큼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의 입가에도 웃음이 맺힌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인해서. 그 누군가를 위해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외롭지 않게 행복할 수 있었으면. 따뜻해진다. 아직은 무겁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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