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기적이 우네 나를 두고 멀리 간다네
이젠 잊어야 하네 잊지 못할 사랑이지만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헤어졌다 또 만난다네
기적 소리 멀어져 가네 내 님 실은 마지막 밤차
멀리 기적이 우네 그렇지만 외롭지 않네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헤어졌다 또 만난다네
기적 소리 멀어져 가네 내 님 실은 마지막 밤차
멀리 기적이 우네 그렇지만 외롭지 않네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헤어졌다 또 만난다네
기적 소리 멀어져 가네 내 님 실은 마지막 밤차
멀리 기적이 우네 그렇지만 외롭지 않네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헤어졌다 또 만난다네
기적 소리 멀어져 가네 내 님 실은 마지막 밤차
멀리 기적이 우네 그렇지만 외롭지 않네
어렸을 적 우리집에는 TV가 없었다. 옆집에 TV가 있었다. 아니면 중풍으로 앓아누운 주인집 안방에 TV가 있었다. 그래서 딱 밥 때 되서 하는 만화영화들이 그리 미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 밥먹는데 앉아서 TV나 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 그래도 주인집이든 옆집이든 아들들끼리 서로 친했기에 굳이 TV를 보는데 큰 거리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날아라 태극호'도, '우주전한 V호'도, '달려라 승리호'도, '이상한 나라의 폴'도, 아마 아는 사람도 드물 '버드맨'까지 남의 집에서 항상 재미있게 챙겨볼 수 있었다. 오죽하면 당시 그림일기를 쓰는데 그 내용이 거의 만화영화 본 내용들이었었다. 어머니가 기함하셨었다.
아무튼 당연히 흑백이던 시절 남의 집 TV로 보았던 가수는 둘이었었다. 하나는 윤수일, 다른 하나는 이은하였다. 심지어 윤수일의 경우는 이주일과 함께 출연했던 코미디프로그램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아마 당시 윤수일이 타잔 복장을 하고 있었을 텐데 그것이 이주일의 초기 공중파출연작이었을 것이다. 이후 이상해와 함께 했던 판토마임으로 아주 대박이 났었다. 너도나도 이주일의 펭귄스텝을 흉내니며 판토마임을 한다고 난리치고 있었으니. 나는 싸움을 못해서 항상 이주일을 구박하는 이상해 역할이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전이었던가 TV쇼프로그램에서 요상한 춤을 추는 여가수를 보았었다. 참 하늘이며 땅이며 사방을 열심히도 찔러대던 아주 흐릿한 얼굴의 여가수였다.
위의 동영상을 보면 그렇게 많이 찔러대는 것 같지 않은데 아무튼 내 기억으로는 진짜 많이 찔러대고 있었다. 그것이 디스코라는 것은 나중에 듣고 나서야 알았다. 가사는 그보다 뒤에야 겨우 다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시 한 마디 만큼은 아직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던 그때부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멀리~~ 기적이 우네!!"
원래는 여기서 몇 번 더 하늘을 찔러줬어야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뒤이어 '아리송해'라는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도 모르고 따라부르던 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대림동에 영창피아노가 있고, 아마 무슨 제약회사 공장이 있었을 무렵일 것이다. 구로구청쪽에서 대림동으로 건너갈 때는 다리가 없어서 비계에 쓰이는 구멍난 철판으로 만든 출렁다리로 건너다니고 있었다. 도림천가 구로동쪽 둑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동구로 국민학교가 보이는 곳에는 제법 큰 버드나무까지 두 그루 자라고 있었다. 언제인지 감도 잡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변전소 있는 자리에 작고 낮은 구멍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늘어서 있었으니. 가사도 다 모르면서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와 이은하의 '아리송해', 그리고 신중현의 '미인'만 의미도 모르고 반복해 따라부르고 있었다. 이은하가 '아리송해'를 불렀다는 사실도 그래서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나마 이사가고 나서는 TV를 빌려볼 수 있는 곳도 아예 없어졌으니.
어쩌면 TV가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추자 역시 화려한 율동을 자랑했지만 당시 TV의 위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었다. 그에 비하면 이은하게 이르러 '밤차'의 손가락춤은 어린아이들까지 내용도 모르고 흥겹게 따라하던 말그대로 유행이 되어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은하의 외모는 연예인으로서 특출나게 빼어나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편이었다. 자신도 나중에 쇼프로그램 등에서 그 사실을 농담거리로 삼은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래가 훌륭했기에 TV시대에도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노래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데 단지 외모 때문에 번번이 좌절하고 끝내 성형까지 해야 했던 어느 가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피부색까지도 따지지 않고 그저 노래만 좋으면 대중의 사랑을 받고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은하의 전성기는 그러고도 무려 10년 넘게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초라해진 그녀의 모습이 그래서 더 서럽고 안쓰러운 이유일 것이다. 그 시절을 TV로 함께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음에도 내게 혜은이와 이은하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혜은이가 TV에 출연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에 어른들의 무책임한 험담을 들으며 보았던 반면 이은하는 그보다 더 전에 남의 집 TV로나마 직접 노래하는 것을 보았고 들었던 것이었다. 윤수일에 대한 나의 감정이 조용필에 대한 것보다 더 남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나만의 TV스타라고나 할까? 각인효과인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이은하가 방송에 나와 손가락질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음에도 나에게 이은하란 기적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었으니. 윤수일도 역시 '사랑만은 않겠어요'보다는 코미디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노래인 '나나'를 부르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수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 TV에 대한 기억이다. 그저 검고 하얀 것으로만 기억되던 낡고 화질도 형편없던 TV에 대한 기억인 것이다. 어차피 남의 집 TV였고 당시 많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탓에 얼마 없는 기억들이 더 소중하고 간절하게 여겨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 박정희가 죽기 전, 밤이면 통행금지의 사이렌이 울리고, 골목길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더러운 검은 흙이 깔려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왔다바'와 냉동고도 없이 좁고 긴 아이스통에 색소로 만든 아이스바를 팔고 있었다. 이름이 아맛나였던가. 아니 그건 좀 나중에 나온 놈일 터다. 거리에는 아직 망태를 짊어진 넝마주이들이 쓰레기장을 뒤지고 다녔었다. 지금 구로동 사는 사람이면 경악스러울지도.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비둘기아파트 자리는 원래 밭이었어서 거기서 여름이면 개를 잡아먹고는 했었다. 살아있는 개를 몽둥이로 때려서 한쪽에 올려 놓은 가마솥에 삶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개뼈도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수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어쩌면 참 인간적으로 불운하고 불행했던 경우라. 과연 어디까지 써야 할까 고민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저 노래가 들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는 것이다. 좁고 어두운 방과 그만큼이나 어두운 화면과 그저 하얗게만 보이던 율동이. TV는 마법의 상자였다. 아직은 TV만 보느라 공부는 않는다고 야단치는 부모님도 안계셨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아무 걱정 없이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오늘만 즐거우면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그 곳도 그 사람들도 지금 나마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냥 떠올랐다. 참으로 오래된 기억이다. 너무나 오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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