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더 - 엄마가 엄마로 태어날 때...

까칠부 2018. 3. 16. 10:52

불교에서 1겁은 사방이 15킬로미터인 성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에 하나씩 꺼내서 모두 비우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저 옷깃만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 겁을 500번을 반복하는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그보다도 더 긴 8천겁의 인연이 필요하다.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저 육신으로 만나서 인연이 아니다. 물론 우연히 엄마의 뱃속에서 나게 되는 것도 큰 인연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정으로 부모라 느끼고 자식이라 여기는데는 그보다 더 큰 인연이 필요할 터다. 낳아서 부모가 아니고 태어나서 자식이 아니다. 엄마라 부르고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단순한 행위마저 수천겁의 시간에 이르는 큰 의미를 갖는다. 아이에게 이미 엄마이고 엄마에게 이미 자신의 아이다.


아이가 선택했다. 딸 혜나가, 아니 이제는 윤복(허율 분)이 엄마 강수진(이보영 분)을 선택했다. 그리고 오히려 엄마 강수진이 윤복을 만난 순간 엄마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참 절묘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엄마 강수진이 딸 윤복을 낳은 것이 아니라 딸 윤복으로 인해 엄마 강수진이 태어난 것이다. 어려서 미혼모가 되어 가족들과도 등진 채로 힘든 시간들을 견뎌야 했음에도 어린 수진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려 했던 친엄마 남홍희(남기애 분)처럼. 차영신(이혜영 분) 역시 어린 수진과의 만남을 계기로 남은 모든 시간들을 오로지 세 딸의 엄마로서 살아올 수 있었다. 반면 혜나를 낳았음에도 친엄마 자영(고성희 분)은 끝내 엄마가 될 수 없었다.


과연 가족이란 하늘이 정한 천륜인가, 아니면 인간이 세운 도덕이며 규범인가, 그도 아니면 그보다 더 크고 깊은 또다른 의미인 것인가. 낳아서 부모가 아니고, 세상이 인정해서 가족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 부모라 여기고 자식이라 여긴다.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으로 부모를 사랑한다. 그 마음인 것이다. 그 진심이다. 그래서 더이상 서로가 아니면 안되는 사이. 이기와 이타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계다. 엄마이기에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자식이기에 부모를 위해 어떤 것이든 견딜 수 있다. 그저 함께이기만 하다면.


마지막은 강수진의 가족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그들을 가족이게 하는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그래서 그들은 가족일 수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 더 진실한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어야 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엄마와 딸이 만나고, 다시 엄마와 딸이 헤어지고, 그리고 또다른 엄마와 딸들이 태어난다. 제목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강수진의 입을 빌어 직접 그 이유를 말해준다. 낳아서 엄마가 아니다. 엄마로서 태어났기에 엄마다. 자식이 엄마를 엄마로 태어나게 만든다. 반드시 피로 이어지지 않았어도. 누가 뭐래도 차영신은 수진과 이진, 현진의 엄마였고 엄마로서 죽은 이후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기른 딸들이 제각각 친엄마와 친아빠를 찾아갔어도 누가 그를 엄마가 아니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엄마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엄마들을 엄마이게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이고자 하는 수많은 엄마들의 이야기다.


아니나다를까 노골적이지 않아 더 아련한 희망을 느끼게 만드는 엔딩이었다. 상상이 그 과정과 결과들을 마음껏 부풀리게 만든다.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엄마와 딸이 다시 함께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단지 거짓이고 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런 희망과 기대가 있다면 어떻게든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딱 넘치지 않을 정도만 그 경계에서 절묘하게 절제한 감정들이 더 깊고 풍부한 감정들을 느끼게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그 느낌이, 그렇게 서로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는 사람들의 진실한 마음이 고스란히 TV를 통해 전해진다. 배우들의 연기였고 작가의 대분이었고 감독의 연출이었다. 감동이라 부른다. 여운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