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다. 사람들이 신을 믿고 기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행복해져야 한다. 착한 사람이 이겨야 한다. 올바른 사람이 성공해야 한다. 어차피 세상이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애써 허구인 드라마를 위해서 게시판에 글도 쓰고 심지어 방송국에 전화까지 한다. 그렇게라도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착하고 올바른 사람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대신 구원받는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나쁘다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다시 없을 흉악한 범죄자라도 저마다 자기만의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다. 그래야만 했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나쁜 놈들일수록 오히려 이겨서 높이 올라가고, 비열하고 더러울수록 더 쉽게 성공하는 현실을 보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세상이 그렇게 되어 먹은 탓이다. 그래서 내가 이리 비루하고 억울한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그래서 꿈을 꾸게 된다. 어디선가는 진짜 착하고 올바른 자격있는 사람이 승리하고 성공하는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라면 자신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단지 꿈일지라도.
이지안(이지은 분)이 여전히 박동훈(이선균 분)의 일상을 엿듣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일상이 고단할수록. 쫓기는 삶이 피폐할수록. 어둡고 좁은 고시원에 겨우 몸을 누이고서도 그 순간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어쩌면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지피던 성냥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이지안이 바라던 세상이 있었다. 이지안이 그리던 좋은 사람 박동훈이 있었고, 그런 박동훈이 자신의 도움으로 추악하고 비열한 도준영(김영민 분)의 방해에도 상무까지 되고 있었다. 모두가 기뻐한다. 어머니와 형제들, 아내, 그리고 그동안 인연으로 맺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한마음으로 기뻐해준다. 그곳에 마치 자기도 함께 있는 것 같다.
오래전부터 이지안이 박동훈의 핸드폰을 도청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동훈을 위해 발벗고 나서게 된 이유였다. 차라리 당장 도준영이 쥐어주는 돈보다 박동훈의 핸드폰을 도청하며 듣게 된 그쪽의 세상이 그에게는 더욱 간절했을 테니까. 그래서 무심코 그리 내뱉었던 것일 게다. 어서 나이를 먹고 싶다. 나이를 먹어 박동훈의 무리처럼 되고 싶다. 그때쯤 되면 자기도 그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에 속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꿈을 꾸어본다. 박동훈이 행복해지도록. 자기가 행복해지도록. 그것을 이지안은 사랑의 감정이라 착각한다. 그저 박동훈의 삶을 동경했을 뿐이다. 그래서 박동훈과 같은 사람이 도준영과 같은 악당을 이길 수 있는 그런 현실을 꿈꾸었을 뿐이다.
사실 사람이 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신에게 자신을 스토킹해달라 부탁하는 것과 같다. 수십억에 이르는 사람 가운데 유독 자신의 바람만을 듣고 그대로 이루어준다. 매순간 자신을 살피고 자신이 간절히 소망하고 기대하는 바를 찾아내어 그대로 들어준다. 혼자가 아니다. 혼자인 순간에조차 누군가 자신과 함께 있다. 그래서 박동훈과 이지안은 동류다. 박동훈도 이지안도 결국은 외로웠던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한 마디만 해주기를 바랐었다. 자신을 위해 단 한 마디만 해주었으면 바라왔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간절히 듣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들려준다. 자신이 바랄 때 나타나주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박동훈과 이지안은 도청이라는 부정한 수단을 통해 서로와 이어진다. 이지안은 박동훈을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꿈을 꾸고, 박동훈은 이지안을 통해서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위로를 얻는다. 형수 조애련(정영주 분)의 거친 한 마디에 결국 정희(오나라 분)도 오랜 족쇄를 풀어준다. 하나 뿐인 친구였다. 그러나 또다른 친구로 인해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조차 함부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희가 물었을 때 보인 박동훈의 표정은 타인을 위해 인내해 온 순간들을 말해준다. 그만큼 박동훈 자신도 역시 힘들었고 괴로웠고 외로웠다. 그것을 차마 감히 다른 사람을 위해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했었다. 그런 마음까지도 이지안은 알아준다. 이지안이 말하고 싶었던 사정들까지 말하지 않아도 박동훈이 모두 알아준다.
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진심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그 진심을 또한 들어줄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어려움에도 끝까지 버티며 견딜 힘을 가질 수 있다. 하필 두 사람이었다. 그동안, 아니 지금도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있을 테지만 하필 서로를 알아봐 준 것이 바로 서로들이었다. 그 마음이 도청이라는 부정한 수단을 통해 이어지며 서로를 위로해준다. 다독이며 북돋워준다. 실질적인 도움도 주고 있다. 꿈처럼, 어쩌면 신앙처럼. 그렇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자신을 지탱해주며 힘들고 고단한 지금을 견디게 한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처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제와서 전혀 상관치 않는다. 현재가 중요하다. 실제가 중요하다. 자신을 도청했다는 사실보다 그로부터 전해지는 간절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과연 이지안은 그를 통해 무엇을 들었고 자신은 이지안으로부터 무엇을 받았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진짜 가치있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아내 강윤희(이지아 분)도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부담스럽기만 하던 인간관계가 어쩌면 자기가 지나쳐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대부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러니까 인연이 마음대로 맺고 끊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잊는다고 인연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돌린다고 인연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연이다. 사랑하는 것도 인연이고 돌아서서 잊는 것도 인연이다. 그 인연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조차 사실은 인연에 얽매이는 것이다. 놓아 버리려 하니 놓아버리지 못한다. 정희도 비로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더이상 되돌릴 수 없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여전히 그를 사랑해도 그것은 추억처럼 남은 감정일 것이다.
궁금했었다. 박동훈이 이지안이 자신을 도청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파국을 예정한 관계라 생각했었다. 이지안 자신의 죄로 인해 파멸이 예정된 부정한 관계로 불안한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상당히 뜻밖이었다. 그래서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도 박동훈의, 아니 현대인의 고독을 묘사할 수도 있구나. 원래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누구나 외롭다. 무엇이 인간을 그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드라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래서 사람은 드라마를 본다.
물론 부정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언제든 부정될 수 있는 불안한 관계임을 의미한다. 진짜는 현실에 있다. 인간이 현실을 사는 이상 구원 역시 현실에 있을 수밖에 없다. 현실이 배제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꿈이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박동훈은 지금도 자신을 도청하고 있을 이지안에게 한 마디 한다. 인간대 인간으로서. 현실로서. 새로운 시작과 마무리를 위해서.
아무튼 가만 보면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참 허튼 소리도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해석이 맞을까? 이런 감상이 옳을까? 그런데 원래 그런 것 따지며 글쓰는 타입이 아니기도 했다. 그냥 박동훈을 도청하는 이지안의 모습에서 드라마를 보며 일희일비하는 시청자의 모습을 봤고, 이지안이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동훈에게서는 신의 기적을 바라는 군중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원래 이상한 것인지. 아무튼.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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