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그날 밤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까칠부 2018. 7. 15. 07:24

아마 드라마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려는 듯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선뜻 말하기를 꺼려하는 그것을. 진정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것인가. 그저 일본의 탓만 하기에는 당시 조선의 문제도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인이 되어 돌아온 유진 초이(이병헌 분)이나 일본인이 되어 칼을 휘두르는 구동매(유연석 분)처럼. 그리고 양반인 고애신(김태리 분)만이 조선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드라마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날 밤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하긴 지금 후방부대에서 무료하게 일상을 보내는 장교들 가운데 이순신 뺨치는 군사전략가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는 이들 가운데 시대만 잘 타고 났다면 수많은 이들을 떨게 만들 용장 맹장이 있을 지 누가 아는가. 방안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며 노는 누군가는 유사시 총을 들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애국지사가 될 수 있다. 뜨거운 피가 그렇게 시킨다. 차라리 자신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지금의 혼란이, 그로 인한 위기가 자신을 더 들뜨게 만든다.


나라만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고애신도 그저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평범한 여인으로 아무일없이 살다가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알고 똑똑해도, 아무리 가진 뜻이 높고 아름다워도,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다른 수많은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규방에 갇혀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다가 이름없이 삶을 마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자신이 있고, 그럴 수 없도록 만드는 세상이 있다. 자칫 그런 와중에 누군가의 총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감당할 수 없는 수모와 고초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자신이 뜻한대로 살 수 있다면 기회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저 비천한 백정이었다. 그저 누군가의 재산에 불과한 비천한 노비에 지나지 않았다. 혼란은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어 준다. 한낱 소작농의 자식인 주원장이 대명제국의 황제가 되고, 농민의 아들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간바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구동매는 마음껏 조선인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고, 미국의 장교가 되어서 대단한 양반들 앞에서도 유진 초이는 당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온 조선에서 또다른 자신의 운명을 찾는다. 고애신의 말처럼 난세가 만든 자신들의 낭만이다.


물론 아름답기만 한 낭만은 아니다. 마음에 한 점 거리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낭만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기에는 혼탁한 시대다. 난세가 기회가 되는 것은 순종하는 선의가 아닌 거스르는 악의에 더 관대하기 때문이다. 고애신 역시 조선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삶을 거부하는 반역자였을 것이다. 조선을 지키는 것도 구하는 것도 오로지 조선을 지배하는 양반, 그리고 남성의 몫이다. 하지만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조선인으로서, 그리고 양반으로서, 여성을 넘어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여겼었기에. 그것이 고애신의 순수며 고애신의 낭만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다.


결코 행복할 수만은 없다. 당장 지금 고애신을 뒤에서 훔쳐보며 희롱하는 일본도, 고애신의 앞을 막아선 미국도 모두가 조선이 전부 나서도 감당할 수 없는 강자들이다. 고애신 혼자 힘으로 아무리 애써봐야 무엇보다 역사가 기록한 그대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일본군에 잡해서 모진 고초를 겪어야 할 지도 모르고, 아니면 먼 이역타향을 떠돌며 이룰 수 없는 꿈을 부여잡으려 할 지도 모른다. 심지어 끝끝내 자신의 뜻을 꺾고 현실에 순응하는 선택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고애신은 침묵하지 않았고 현실로부터 눈돌리지도 않았다. 그런 시대를 정면으로 뛰어들며 몸으로 부딪히고 있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난 지금의 후손들에게 그런 삶은 낭만으로 비출 수 있다.


기회를 잡았고 꿈을 이뤘다. 기회를 쫓았고 목표를 이뤘다. 어쩌면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도 구동매와 유진 초이에게는 낭만이었을지 모르겠다. 아직 누구도 가지 못한 길을 갔고 마침내 자신의 의지로 이뤄냈다. 그러나 진짜는 지금부터다. 그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이다. 여전히 그들은 조선인이고 그들이 머무는 땅은 조선이다. 그들이 끝까지 일본인이고 미국인일 수 있다면. 조선과 상관없이 일본인으로 미국인으로 살 수 있다면. 그들도 그들이 지키고 싶은 순수와 만날 때가 온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는 것이다. 역사든 드라마든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째서 하필 이 시대였을까. 이토록 우울하고 불길하기만 한 시대였을까.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다. 설사 행복해지더라도 그것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불행조차도, 고통조차도, 그들이 겪게 될 어려움조차도 시대라고 하는 거리 밖의 관찰자에게는 낭만일 수 있다.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사는 그들에게 낭만일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아름답기 위해서. 그림은 아름답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