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웃긴다. 시대는 비장한데 정작 살아간 사람들은 웃기기만 하다. 하물며 남녀상열지사로 어느새 시대의 비장함마저 잊는다.
하긴 시대의 경계는 항상 혼란스러웠다. 이것저것 마구 섞이며 일상의 균형과 조화가 허물어진다. 일상이 비일상으로 바뀌고 비일상이 일상으로 대체된다. 당사자들이야 더없이 진지하지만 그런 부조화와 비대칭이 일상마저 한바탕 소동으로 바꾸고 만다. 혼란은 곧 헤프닝이다.
괜히 TV예능프로그램에서 낯선 외국인에게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나 일상을 소개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문명인과 야만인이 만나며 일어나는 헤프닝은 코미디의 단골소재이기도 했었다. 조선의 전통과 서구의 근대가 만난다. 아직 조선의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이 낯선 서구의 문물을 경험한다. 영어도 사랑이란 단어도 전통교육을 받은 조선 사대부가의 규수에게는 그저 낯설 뿐이다.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수십년 세월을 미국인으로 살았던 유진 초이에게도 조선이란 낯선 이방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노비의 신분으로 조선을 떠나기 전에도 그가 경험한 조선이란 무척 제한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30년이나 전에 등졌던 나라치고 지금 유진은 조선이란 나라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이다. 한글만 모를 뿐 30년만에 찾은 조선에 대해서 크게 낯설어하거나 어색해하는 것 없이 태연히 일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보다는 역시 조선이 열강 미국의 군인인 그에게 맞춰주고 있다 봐냐 할 지 모르겠다. 그런 부조화다. 그런 불균형이다. 일상을 비일상으로 바꾸고 비일상을 일상으로 만드는 부조화와 혼란이 자칫 진지하고 심각한 일상들마저 코미디로 바꾸고 만다. 어쩌면 작가다 하필 이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인지 모르겠다. 특수한 시대적 배경이 평어쩌면 평범할지 모르는 사랑마저 특별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 어떤 사정으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 했던 교포와의 사랑도 이제는 흔하다.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이야기는 아예 지겨울 정도다. 하지만 하필 그 시대가 구한말이라면. 조선의 전통이 서구의 근대와 뒤섞이며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시대의 현실적 고민이 함께하고 있었다면. 뻔한 집안의 원한을 넘어 한 사람은 침략자로 한 사람은 그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절박함을 가지고 만나게 된다. 그래서 또한 하필 미국인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조선의 주권을 빼았아 식민지로 만든 당사자는 아니었으니까. 실제 당시 조선인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상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필 세 남자 모두 당시 조선사람들을 괴롭히던 문제의 원흉들이다. 제국주의 그 자체인 미국이나, 그 제국주의를 본받아 조선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일본이나, 그런 위급한 현실에도 손놓고 있던 엘리트 지배층이나. 하필 고애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세 남자가 바로 이들 세 부류와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고애신도 유진에게는 막연한 호감을 보이면서 일본의 낭인이 된 구동매에게는 두려움과 혐오를, 비겁하도 무기력한 김희성에게는 경멸과 함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출신이 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유진은 다른 두 남자와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할 수 있다.
아무튼 귀엽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고, 자기가 틀렸늠에도 억지로 아닌 척 수습하려 고집을 세우는 모습이 철없는 어린 소녀같다. 그러면서도 나라와 백성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할 때는 누구보다 잔지하다. 그런 부조화와 불균형이 고애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든다. 정확히 배우 김태리의 매력이다. 명문가의 애기씨일 때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있다가도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어서는 대책없이 허물어질 줄 안다. 터무니없는 고집도 떼쓰기도 심지어 다짜고짜 권총을 겨누고 위협하는 모습마저 어울린다. 그 중심에 배우 김태리가 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밀리지 않고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완고함과 강인함이 있다. 코믹도 진지함도 모두 한 캐릭터 안에 녹여낼 수 있는 김태리와 이병헌 두 배우의 존재가 고애신과 유진 초이를 현실에 있게 한다.
구동매의 매력이 저들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다. 모순이 없다. 그늘이 없다. 한결같고 일관되다. 김희성도 이제까지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미군 장교와 일본 낭인 앞에서 지금까지 그저 한량이던 자신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확실히 한때 고려와 조선을 떨어울리던 칼잡이의 모습을 비로소 보여준다. 이대로 내 여자를 너희같은 놈들에게 빼았기지는 않겠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키고야 말겠다. 이번에는 유연석이 캐릭터에 힘을 뺄 차례다. 다만 그러기에는 그의 한과 독이 너무 깊다.
대사가 맛깔나다. 역시나 작가다. 캐릭터마다 독특한 어법과 말투를 만들어낸다. 대사가 아닌 그 대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정의한다. 이번에는 고애신이다. 물론 남자들의 대사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다. 사랑이란 때로 자신을 망치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사람들은 그 위험한 감정에 자신을 내던지고는 한다. 그만큼 힘들고 어렵고 위험하고 그 보상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뻔하고 흔한 대사인데 전혀 특별하게 들리는 아유는 역시 그들이 놓인 상황이 특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다. 갈수록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 어째서 구한말인가. 어째서 그토록 우울하고 안타깝기만 한 시대가 배경인 것일까. 그 시대여야 가능한 이야기도 있다. 시대가 불길해도 사람은 살아간다. 사랑도 한다. 그런 시대이기에 가 삶도 사랑도 특별하다. 운명은 너무 상투적이다. 그냥 그 시대이기에 가능한 사랑이야기일 것이다. 행복할 수 있기를. 너무나 불안한 바람이다. 사랑스러운 연인들이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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