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조금은 덤덤하던 로맨스가 더 극적으로 바뀌게 될까? 좋은 사람이니 좋아하고, 좋아하니까 사귄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서 너무 심심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마치 양념처럼 장식처럼 출판사 이야기가 더 주가 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강단이가 학력과 경력을 속이고 입사한 것이 들통났으니 출판사의 직장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온 것은 아닐까.
송해린이 강단이와 차은호가 함께 사는 것을 눈치챘다. 함께 사는 것까지는 몰라도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지서준이 무심코 저지른 실수로 어렴풋 눈치채게 되었다. 의식하고 보니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하필 그날 밤새고 작업한 뒤 잠도 못자고 만나서 선잠에서 깬 몽롱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함께 마주 어깨를 기대고 자는 모습이 꽤 어울려 보이기도 했었는데.
상쾌한 느낌이 좋았다. 수모의 '진심이 닿다'에 이어 '로맨스는 별책부록'까지 맺히거나 걸리는 느낌이 없는 그 투명함이 마음에 들었었다. 여기서 새삼 누구나를 질투하고 그래서 음모를 꾸미고 하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봐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동안 보아 온 것이 있으니 나름 기대하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명하게 시원하게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가지 않을까.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자신들답게 올곧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플려 하지 않을까. 그동안 보아온 송해린의 캐릭터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부모의 오롯한 사랑을 받고 자란 티가 넘치도록 난다. 그 부모님도 낭독회장으로 와서 차은호를 잡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차은호는 벌써부터 솔직했고, 강단이도 차은호에 대해 솔직해지고 있다. 아예 지서준과의 관계마저 일찌감치 선을 긋고 정리하고 있었다. 이것밖에 안되는 사이다. 더이상 부정할 수 없음을 아는 순간 강단이의 선택도 분명해진다.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진심이라서 두렵지만, 그래서 두렵지 않은 그저 즐겁기만 한 연애를 계속 하고 싶지만, 그래도 항상 진심이 우선이다. 위험해도, 불안해도, 그래서 두렵더라도 결국에 진심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다. 지서준은 과연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래서 말하지 않은가. 송해린과 지서준도 너무 자주 만나고 너무 잘 어울린다고. 사람마다 각자 짝이 있는 것이다. 실연이란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결혼으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이름바 경단녀들 만큼이나 여전히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여성들 역시 모순된 현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고유선은 그래서 결혼직전 도망쳐야 했고 서팀장 역시 지금도 회사에 원치 않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당당히 아이가 아파서 곁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이에게는 엄마 말고도 아빠도 있지만 항상 아이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는 것은 엄마이고 그때마다 엄마이기에 아이의 곁을 지키려 회사일도 뒤로 한 채 거짓말부터 해야 한다. 어째서 갈수록 혼인률도 출산률도 떨어지기만 하는가. 어째서 여성 가운데 결혼하겠다는 사람이나 아이를 낳겠다는 사람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인가. 뒤웅박팔자라는 말 그대로 어쩌면 자신의 남편이 되었을 수도 있는 옛사랑의 고단한 현실이 곧 고유선 자신의 현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남편의 사업실패가 강단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것처럼.
그러니까 최소한 직장인으로서 일과 사생활을 혼동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송해린이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강단이의 이력위조를 알게 된 고유선 이사의 판단 역시 철저히 공적인 위치에 맞는 합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고편과는 다른 반전을 기대하기는 한다. 하지만 역시 회사도 공적조직인데 이력을 속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회사에서 사장 다음인 이사다. 인정에 얽매이지도 휘둘리지도 않으며 철저히 냉정하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들은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신입 오지율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적정한 선을 지킬 줄 아는 이들이었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감정 정도는 얼마든지 구분할 줄 안다. 다만 융통성없는 것과 합리적인 것과는 또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그린 것 같다. 정말 많이 봐 왔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심지어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무모할 정도로 순진한 사회초년생들을. 상사가 자기 머리 꼭데기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참 위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그동안 자신이 보아온 세상만이 전부고, 따라서 자신이 배우고 겪었던 것들로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얼마나 얕고 짧고 좁은 생각인지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한다. 주위만 복장이 터질 뿐이다. 아마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이들이 지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고를 치고 자기가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깨닫고 난 뒤에도 경위서라고 꼭 자기처럼 써내고 있었다. 자각이 없다는 것도 참 슬픈 것이다. 과연 오지율도 송해린이나 다른 직원들처럼 한 사람 몫을 하게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기대는 안되지만 남의 일이니 귀엽기는 하다. 남의 일일 때만 사람은 항상 웃을 수 있다.
초라해진 옛추억과 만났을 때. 행복하리라 믿었던 자신의 후회와 다시 마주했을 때. 그럼에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루함이. 차라리 한 마디 원망도 비난도 퍼부울 수 없는 자신의 잘못들이. 그럼에도 다행이었을까.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고 가족들과도 행복한 듯 보였다. 자신만 여직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자신만 과거에 버려진 듯 여겨졌다.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까. 과거의 후회와 미련에 대해서. 친구가 필요할 것이다. 고유선은 참 매력적이다. 아는데도 자신감이 없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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