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 씁슬한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 공허한 쾌감

까칠부 2019. 4. 23. 07:11

아직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란 단지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 경제가 잘 되려면 기업이 잘 되어야 한다. 기업이 잘되려면 노동자가 잘 해야 한다. 여기서 잘한다는 것은 기업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뜻한다. 돈에도 욕심내지 말고 힘들다고 쉬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하는 것이야 말로 애국하는 길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여주는 것이야 말로 나라경제를 망치는 포퓰리즘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야 어떻게 기업을 살리고 나라 경제를 살리겠는가.

 

이제는 그저 무덤덤한 현실인 것이다. 월급 떼먹은 놈이 오히려 큰소리치고, 떼인 월급 받으려는 이들이 죄인이 되어 엎드려 사정해야 하는 것이다. 법을 집행해야 하는 정부마저 정작 법을 어긴 사용자보다 법을 어긴 사실을 고발한 노동자에 더 엄격하고 가혹한 경우가 더 많을 정도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라 경제를 위해서는 기업이 잘되어야 하고 기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잘해야 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모든 이익을 포기한 채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 임금 떼먹히고도 인내하고 근로계약서도 없이 노동자로서 권리를 아예 무시당하면서도 침묵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만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다. 국민이란 이름의 대중이 그렇다. 내 일이 아니면 어째서 노동자들이 그리 자기 밥그릇 챙기는 일에 열심인가 혀를 차기 일쑤다. 갑질에는 예민하지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차라리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나만 잘하면. 나만 열심히 하면. 그러면 회사 사정도 나아지겠지.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밀린 월급도 해결해주겠지. 매일 야근해야 하는 상황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사장이라는 놈은 그런 순간에도 룸살롱에서 여자끼고 술이나 쳐마시고 있었다. 하긴 접대였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라도 일을 더 따내려 그 비싼 돈 써가며 관계자들을 접대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동자를 쥐어짠 만큼 돈 쓰고 단가를 후려쳐서 일을 따낸다. 그렇게 회사를 위해 월급도 못받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일을 한 대가는 결국 상관도 없는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더 끔찍한 것이다. 차라리 사장놈이 혼자 다 쳐먹었다면 그거라도 닥달해서 받아내겠지만 어차피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도 그 이익은 그보다 위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사장 역시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에 적응하며 그리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되는 곳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 하는 곳에서는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헬조선 아니던가.

 

그토록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일자리 없다고 너도나도 난리치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대기업 일자리다. 나라경제를 위해서 대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얻도록 쥐어짜여야 하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있는대로 쥐어짜이느라 직원들 급여며 복지며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그런 중소기업을 위에서 굽어보며 쥐어짤 수 있는 대기업에 가기만 바라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주의며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노동자를 위하는 것은 공산주의이며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즘인 것이다. 중소기업도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지 정부나 정책에 기대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회가 그것을 바라고 그러도록 압박한다. 그래서 정부도 그에 맞춰 가는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편에서 수많은 재판을 치렀던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그럼에도 노동정책에서 상당히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국민이 바라니까. 국민이 바라는대로 정책을 펴야 국정의 동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근로감독관들의 무사안일이나 사용자편향적인 태도만 비판한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근로감독관을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은 스스로 노동자라 여기지 않는 국민들 자신이다.

 

하긴 스스로 노동자라 여기는 사람들부터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의 권리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면서도 입맛이 쓰다. 주 52시간조차 너무 적다고 반발하고, 알바들 월급도 너무 많다며 주휴시간까지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주제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해서 함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마저 부정적이다. 노동자는 그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회사가 주는대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돈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는 정당한 자기 권리가 아니라 오로지 사용자의 선의에 의해 베풀어지는 사용자의 권리일 뿐이다. 그래서 노예가 된다. 갑을관계가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양태수의 그같은 갑질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오히려 최근에 와서야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많다.

 

드라마를 보면서 불편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통쾌한데 과연 통쾌하기만 한 일인가. 오히려 국회에서 법으로 정해 해결하면 되는 일들이다. 정부가 정책을 보다 강화해서 엄격하게 적용하면 되는 일이다. 고작 근로감독관 한 사람의 선의와 노력에만 기대 해결할 사안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드라마를 보면서 통쾌해하던 이들도 사회주의네 빨갱이네 반기업정서네 하며 기업과 정치인들의 힘을 빼고 그들을 궁지로 내몬다. 그동안 그래왔었다. 노동자의 편에 선 정치인이 오래 살아남기란 힘들다. 더 높은 곳까지 오르기란 힘들다. 노동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들조차 그래서 그런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개인의 선의는 바라지만 제도적 정책적 변화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드라마와 별개의 현실의 문제에 대한 때로 절망이고 때로 좌절이다. 안타까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