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뱅커 - 강삼도의 마지막 선택, 인간이 악해지는 이유

까칠부 2019. 5. 17. 07:20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는 것이 옳았다.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길들여지며 바뀌어간다. 원래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처음부터 그래왔었던 것처럼. 그러나 자신은 원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차라리 비명이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행장 자리에도 집착해 왔던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었던 것처럼 나 아니면 안되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너무 잘 알고 너무나 잘 해 왔던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 집착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아닌 믿음에 대한 집착인 것처럼. 어쩌면 역사상 많은 독재자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대한은행을 사랑했었다. 누구보다 대한은행을 아끼고 위해 왔었다. 어느 순간 목적과 수단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뒤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대한은행을 위한 것이었다. 대한은행의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바랐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사심없이 강직한 노대호가 자신을 말려주기를. 자신을 막아서 주기를. 그래서 자신을 일깨워주기를. 차라리 후련하다. 원래 이것이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이었다. 마지막 대한은행을 구하는 것은 은행장 강삼도의 선택이고 결단이었다. 자신이 모든 오점을 끌어안고 대한은행을 구하겠다. 마지막 순간 그는 진정 대한은행의 은행장이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감시도 비판도 받지 않는 권력은 결국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강삼도의 불행이었다. 그에게는 노대호가 없었다. 항상 가까이서 감시하며 비판해 줄 노대호라는 감사가 없었다. 이해곤은 행운아다. 은행장으로서의 야심을 바로 가까이서 견제해 줄 노대호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있기에 이해곤은 하고픈대로 마음대로 해도 강삼도처럼 삿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항상 수단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리더로서 가져야 할 집념과 의지로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은행을 향한 그의 야망은 은행에 대한 걱정과 애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누구보다 은행을 가지고 싶은 만큼 아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사욕이 공적인 책임을 넘어서지 않도록, 자칫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누가 그를 감시하며 견제하는가. 강삼도의 곁에도 송실장이 아닌 노대호가 있었다면 아마도 결과는 달라졌을까.

 

처음 본 느낌이 맞았다. 강삼도는 왕이었다. 그래서 굳이 따로 자신을 위한 비자금을 만들 필요도 없었던 것이었다. 오롯이 대한은행만이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자신은 대한은행의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동안 자신의 행동들은 정당화된다. 청렴하지만 부패했다. 악하지만 오히려 선하다.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다. 약한 것이다. 누구보다 대한은행을 사랑했기에. 대한은행을 지켜야 했기에. 그를 위한 모든 수단은 정당화된다. 자신은 정의로워진다. 자신만이 대한은행을 지킬 수 있다. 대한은행을 가질 수 있다. 아마 그래서일까. 드라마 내내 한수지나 강삼도나 다른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나오지 않는다. 왕들이 심지어 가족에게도 잔혹했던 이유다. 오로지 왕은 자신 뿐이다.

 

추악한 욕망 한가운데 인간의 선의와 애정이 어떻게 타락해가는가. 두려움이다. 나약함이다. 도망치기 위해서. 숨기 위해서. 어떻게든 맞서지 않고 피하려 한다.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지고 말 테니까. 주주총회를 앞두고 비겁해지는 이해곤처럼. 그런 노대호를 지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은행원으로서의 신념을 마지막까지 지탱해 준 그것.

 

너무나 당연하고 가깝지만 그러나 너무 먼 이야기일 터다. 문득 몇 년 간의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조금 더 먼 이야기들도. 원작과 다른 것은 바로 한국 드라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을 넘어선 우리들 현실의 이야기다. 인간의 이야기다. 원래 드라마란 인간의 이야기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처럼. 어디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