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 송자인의 공포, 근대와 지식인의 비극

까칠부 2019. 6. 23. 06:56

아마도 송자인에게 가장 큰 공포는 큰 상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마저 결국 일본에 기대야 할 지 모른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백이현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을 개혁하고 문명화시키겠다던 그가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바로 그 모습처럼. 실제 몇 번 그에 대해 썼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 가운데 하나다. 한반도의 근대화를 이끈 선구자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당장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물론 우리와 비슷하게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중국마저도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는 과도기의 역동성을 주제로 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을 선도한 자신들의 선구자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 역시 상당히 긍정적으로 낭만있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자신들이 있다. 과거로부터 지금의 자신들을 잇는 역사의 연속선상에 그들이 있다.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많은 문명의 성과들이 그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멋지지 않은가. 과도기이기에 겪게 되는 시행착오나 수많은 고난들마저도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게 치장될 수 있다.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문명과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그래도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면 일본의 협력 혹은 용인이 절대적이었다. 일본의 허락 아래서만 가능했었다. 일본의 관용 아래서만 겨우 가능했었다. 그런 일본을 거스르거나 그나마 소극적으로 비타협적인 태도만 취했어도 그 이름은 근대화의 선구자로서가 아닌 불의한 침략과 지배에 항거한 민족의 영웅으로서 기록되고 마는 것이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거나, 아니면 일본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결국 역시 고통속에 죽어갔거나. 그나마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서 해방을 맞았다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그 과정까지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낭만이란 그런 시대를 용인하고 혹은 제 3자로서 방관한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굳의 남의 집 처자를 납치해서 저수지에 빠뜨려 죽이고자 하는 이유인 것이다. 과도기였으니까. 모든 것이 바뀌어가는 와중이었으니까. 세상을 근본부터 뒤집으려는 동학이 있었기에 그러부터 기존의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과격한 양반들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아직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세간의 평판이야 어쨌든 결국 자신들이 알아서 감당하고 감수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양반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절대 이대로 보아 넘겨서 안된다.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와 체통을 생각한다면 자신들이라도 나서서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또한 절박함이고 치열함인 것이다. 그래서 황석주는 또 한 걸음 뒤쳐진다. 그가 과연 그토록 간절하게 치열하게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동생의 경멸과 같은 양반들의 비난 속에서 그가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그것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선택해야만 했다. 동학의 편에서 세상을 바꾸던가, 아니면 동학에 맞서 기존의 질서를 지키던가. 마찬가지로 일본이 앞선 문명과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 과연 조선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일본을 따를 것인가. 아니 단순히 조선이냐 일본이냐가 아닌 조선의 구질서와 일본의 근대화된 문명이라면 선택지는 더 복잡해진다. 모순으로 가득한 구체제일지라도 자신의 나라이기에 조선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설사 침략자인 일본의 편에 서서라도 새로운 문명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래서 구한말, 그리고 강제병탄 직후, 무엇보다 특히 태평양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일제강점기 말에 많은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일본의 문명을 본받고자 조선의 민족을 위해 친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일본에 적급 협력함으로써 그들의 호감을 사고 자치권을 늘리겠다. 일본이 부강한 이유를 배워 조선 역시 부강하게 만들겠다. 우습게도 침략자인 일본제국에 협력한 그들 또한 한 편으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한 민족의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너무 명확히 보이는 것이다. 앞으로 상인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능한 왕실과 조정이 아닌, 현실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앞의 어리석은 여자가 아닌 실제 힘을 가진 일본의 말을 듣고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양반의 법도와 체통을 위해 상관없는 남의 집 처자를 살해하던 그 절박함처럼 그래서 송자인도 보부상으로서 적이라 할 수 있는 동학의 봉기를 돕고자 나서게 된 것이다. 아니면 자신 역시 백이현처럼 될 수 있다. 백이현이 아닌 오니라 불리고 있는 그처럼 자신 역시 송자인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될 것을 안다. 결국 자신은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그만큼 상인으로서 송자인의 야심과 이상은 크고 높기만 하다.


더 절실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치열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그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순이 끊임없이 변명하게 만들고 그런 변명들이 어느새 수단과 목적마저 혼동케 몰아간다. 원래는 조선을 위한 것이었을 터였다. 조선의 수많은 힘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양반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인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일본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힘으로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인을 응징케 하고 있었다. 이상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는다. 원래의 목표는 사라지고 단지 그를 위해 필요했을 지금의 신분과 힘만이 남게 된다. 그래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정과 이유들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절대 그들의 선택과 행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그들의 선택과 행동에 조선의 인민들이, 일본의 지배 아래 고통받아야 했던 더 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던 것인가.


그것은 일본 역시 다르지 않다. 물론 그래도 선의로 앞서 문명화를 이룬 일본이 아시아의 문명화를 도와야 한다 여겼던 일본의 지식인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들의 문명과 힘에 취해 조선과 중국을 업신여기고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은 오만과 탐욕이라는 또다른 야만으로 뒤바뀌고 만다. 어느 순간 그들의 이상은 단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다케다 역시 말끝마다 문명과 야만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침략이 아니다. 문명화다. 문명을 전파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 변명은 계속 이어진다. 자신들은 잘못하지 않았다. 최소한 자신들의 의도와 동기는 정당한 것이었다.


과연 조선의 모든 역량을 모은다고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힘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다른 계산들이 있다. 어느새 일본의 눈치를 보고, 일본의 편에 서고, 오히려 앞장서서 일본을 위해 행동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대항하려 하면서도 그보다 우선해야 하는 다른 목적과 가치들이 있다. 관리에게는 관리의 사정이, 양반에게는 양반의 사정이, 상인에게는 또 상인 나름의 이유가, 그래서 정작 일본과 싸운 것은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무지렁이 농민들이었다. 무기도 없이 훈련도 되지 않은 농민들이 머릿수만 채워 싸운 것이었다. 그때 고종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왕과 조정의 관리들은, 그리고 잘난 양반들은 조선이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명성황후 민씨는 딱 역사 그대로인 것 같은데 고종의 미화가 너무 심하다. 고종에게 충분한 의지만 있었다면 조선이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오히려 권력의 주변에 있으니 아는 것이다. 먼 남도의 백성들에게야 그저 왕이란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백이강에도 왕이며 나라며 그저 인상으로만 각인되어 있다. 아는 것이다. 고종이란 어떤 존재이고 조선이란 어떤 나라인지.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런 가운데서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다. 아직 조선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다. 딱 거기까지.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처럼 모든 힘을 일본과의 싸움에 쏟아부을 수 없다. 왕에게 의지가 없고, 지배층에게 그만한 동기와 역량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백이강이 송자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랄까. 그런 때 백이현이 다시 오니란 이름으로 송자인을 찾아간다. 비밀을 지키려는 이와 그 비밀을 들추려는 이가 마주한다. 어차피 결과는 안다. 아니 백이현의 목적이 성공하지 못했어도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니까. 그곳에 마주선 것이 그들이었으니까. 겨우 돌아선 사람들의 선의가 시대의 비극에 묻힌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