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 죽음을 향한 한 걸음, 백이현은 가지 못한 그 길 위에서

까칠부 2019. 7. 6. 17:52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나마 고종이 크게 저항 않고 순순히 나라를 넘겨주었기에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어차피 망할 나라 괜히 지켜보겠다고 일본과의 싸움에 사람이며 물자며 동원하지 않은 덕분에 무의미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희생을 줄인 결과 조선은 결국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었다. 진정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을 포기한 결과 그나마 희생이라도 줄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가치가 큰 만큼 치러야 할 대가 역시 크다. 얼마나 소중하고 절박한가. 그래서 어디까지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죽기를 각오한다. 어차피 질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향해 주저없이 내달린다. 진정 지켜야 하는 것들을 위해. 진정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그것을 위해서. 조선이 아니다. 임금이 아니다. 자신들이 이루어낸 세상이다.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세상이다. 자신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바로 자신들의 세상이다. 다시는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겠다. 사람조차 아닌 짐승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들은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던질 수 있다.


얼핏 어리석어 보인다. 가끔 보인다. 아니 너무 흔하게 보게 된다.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위해 가족마저 희생시키고 마는 이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어차피 되도 않을 일을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을 곤란케 만드는 모습들을 보며 심지어 저주와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현명하고 올바른 삶이란 주위에도 피해를 주지 않고, 가족들 역시 안전하게 행복하게 편히 살 수 있도록 지켜주는 삶이다. 얼마나 좋은가.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산다.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은 대신 누군가는 모든 것을 갖는다. 누군가는 가족마저 모두 죽어 후손조차 없는데 누군가는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후손까지 번창해 있다. 그래서 누가 더 현명했고 누가 더 올바른 삶을 살았는가. 그래서 때로 부질업게 여겨지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바친 이들을 민주화된 세상에서 민주주의와 함께 태연히 모욕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서.


과연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사실이 이성일 것인가. 호랑이와 싸우면 이길 수 없으니 도망쳐야겠다는 판단이 냉정함일 것인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하나가 되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고, 호랑이에게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는 것은 단지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계산이 빠른 것은 그냥 뇌가 하는 기능 가운데 하나다. 당연한 사실을 아는 것은 지능만 받쳐주면 대부분 동물들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생명이 없는 기계가 인간보다 더 정확하다. 강한 적을 만나면 도망치는 것은 뇌가 없는 원시적인 동물들도 당연하게 하는 행동들이다. 그것이 바로 백이현의 한계다. 어려우면 돌아가고 힘들면 물러서고 무서우면 도망친다. 한 번도 정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부딪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그리고 믿어 버린다. 그것이야 말로 이성적이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객관적인 사고에 의한 판단이다. 그것이 문명이다.


남들도 자신과 같을 줄 알았다. 문명화된 일본군의 힘을 몸으로 느끼면 아무리 동학군이라도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군과 자신들 사이에 확연한 힘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스스로 해산하게 될 것이다. 바로 자기가 그래왔었으니까.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들도 자신처럼 어차피 안 될 것을 알면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해서 이성적인 현명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일본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에 굴복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문명을 받아들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도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형 백이강을 포함 대부분 동학군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려 했었다. 죽음을 향해 오히려 스스로 달려들고 있었다. 과연 그 모습을 보면서 백이현이 느낌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비웃음? 경멸? 혐오?


정말 때가 딱 맞아떨어졌다. 그야말로 우금치와 같은 상황이다. 한국 제조업의 원료와 소재등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경제제재를 시도하고 있다. 벌써부터 한국경제 망한다 일본에 당장 양보하고 항복해야 한다 외치는 무리들이 있다. 강제징용피해자들은 버리자. 위안부 피해자들도 잠시 잊자. 큰 것을 생각하자. 더 큰 가치만을 생각하자. 국가를 위해서. 국가의 경제를 위해서. 어차피 되도 않을 싸움에 무의미한 희생을 치러서는 안된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인데 더 큰 피해만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한국의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일본의 사소한 위협에도 벌벌 떨면서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하는 미래다. 더이상 한국은 일본을 거스르는 단 한 마디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심지어 일본이 바라는대로 정권교체까지 되어 버리면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정부마저 일본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1990년대라면 모를까 과연 지금 한국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굽혀야 할 정도로 약한 존재인가.


그렇게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단 한 걸음이다. 자신들 앞에 놓인 경계를 넘는데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만큼의 용기와 의지다. 사육신 가운데 대부분은 후손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지만 그러나 정작 이후 조선의 정신을 지배한 것은 이들의 충절이었다. 독립운동가 대부분 역시 제대로 후손도 재산도 남기지 못했음에도 친일파가 세운 학교에서마저 그들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정신임을 가르치고 있다. 문명을 이기는 것이 문화다. 정신이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경제강국으로 일으켜세운 그것이다. 동학으로 크게 일어난 민중의 힘은 3.1동으로, 6.10만세운동으로, 광주학생운동으로, 4.19로, 5.18로, 마침내 6월한쟁과 지난 촛불혁명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일본은 가지지 못한 것이다. 민중 자신이 자각해서 스스로 일어나 싸워 본 적이 없는 일본은 감히 꿈꿔보지 못한 것이다. 중국은 그렇게 민중이 일어나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민초의 삶은 민초에게로. 자신들은 죽었지만 그들은 정신을 남긴다. 녹두꽃처럼 씨앗을 남겨 다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더럽게 보기 싫었었다. 그래서 나중에 스킵하며 보고 말았다. 차마 끝까지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그래도 드라마라고 민중들의 싸움을 그래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보다 더 비참했었다. 그보다 더 처참했었다. 그나마 고종과 명성황후의 적나라한 모습이 조금 미화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무력했고 무책임했으며 그런 주제에 기득권만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런 왕을 지키고 그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그럼에도 싸워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싸우려 하지 않았기에 잃어야 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싸우기를 포기한 탓에 잃어야만 했던 것들을 낱낱이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송봉길도 지키지 못했고 백이현도 지키지 못했다. 후회라도 남았을까? 차라리 후회마저 없는 쪽이 자신은 더 편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타협해 간다. 백이현의 이후 선택이 궁금해진다. 사실상 주인공이다. 현실에는 너무 백이현들이 많다. 원래 인간이라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