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20세기 소년 - 아베 정권의 과거회귀적 분탕질을 보면서

까칠부 2019. 8. 2. 17:32

사람은 언제 늙을까? 결국 생물학적 노화와 별개로 정신의 노화란 앞으로의 미래보다 지나온 과거를 더 자주 돌아보게 되는 때가 아닐까? 더 나아질 내일에 대한 기대나 희망보다 이미 좋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에 더 집착하게 된다. 나도 좋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잘나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젊다면 그 좋았던 때와 잘나가던 때는 앞으로 자신이 만들어갈 미래에 있을 것이다. 아직 자신에게는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보며 느끼던 반가움과 불쾌함이라는 이중적 감정은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처음에는 반가웠다. 나 역시 그 비슷한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드라마 '응답하라 1987'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유도 그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오로지 내일만 있는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현실에 오로지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사람들은 뒤를 돌아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낙천과 긍정이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으로 기억하게끔 만들어준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무것이든 될 수 있다. 확실히 장래의 꿈마저 너무나 현실적인 지금의 어린세대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낙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라서 어느새 자라는 과정에서 그들은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무엇보다 90년대 초반까지 황금기를 보내고 급전직하 잃어버린 10년의 불황기를 보내게 된 많은 일본의 청장년들에게 현실이란 당장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무언가였을 것이다. 역시 내 또래 많은 사람들에게 IMF란 그런 의미였었다. 한 순간에 자신이 꿈꾸던 미래가 사라지고 끝없는 절망과 좌절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전까지 독재자로서 비판이 더 많았던 박정희가 경제개발의 공을 이유로 추앙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절망속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다만 하나라도 희망이 있어야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복권을 사는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나마라도 일주일을 버틸 꿈이 필요할 테니까. 미래가 그저 절망 뿐이라면 과거로부터라도 희망을 빌려와야 한다. 그래도 그 시절은 좋았었다. 그 시절에는 꿈과 희망이 있었다. 차라리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과거를 추억할 때 인간은 늙어간다 말하는 것이다. 내일에 대한 계획으로 분주해야 할 시간에 그저 과거의 기억만을 곱씹으며 보낸다. 그래서 심지어 그 과거를 현재로 옮겨 오고 싶다.


굳이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먹던 감자와 주먹밥을 먹이려 한다. 자신들이 하던대로 빈곤과 고통을 강요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그동안 지나왔던 과정들을 긍정할 수 있다. 자신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그것들을 불편해하고 심지어 거부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이루어 왔던가. 그러니까 휴가도 못가게 막은 채 병사들을 훈련으로 내몬다. 그런 행동들을 긍정한다. 자기 때는 모두 그랬었다. 지금도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러니까 아예 일본사회 전체를 1960년대로 돌려 놓겠다.


평생을 과거에 사로잡혀 살며 오로지 모든 행동이 그 과거를 향해 이루어진다. 그런 친구의 행동에 또한 많은 이들이 동조한다. 이제서야 이해한다. 그것은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 일본인들의 현실이었다. 일본 장년층들의 정신세계였다. 현재보다 먼 과거의 기억이 더 가깝고 더 직접적이다. 현실이 된다. 그럼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에 기대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아예 일본 전체를 속이려 한다. 잃어버린 10년, 20년, 아니 30년을 지나가는 지금 일본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인가.


과거로 돌아가겠다. 일본이란 나라가 영광스러웠던 먼 과거로 다시 일본을 돌려놓겠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다시 한 번 아시아에 큰소리를 칠 수 있게 하겠다. 경제가 망한 것보다 더이상 어디서도 누구도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의 무서움이다. 인플레이션은 차라리 지금 자신이 가진 현물의 가치가 오를 것을 기대하기라도 하지 디플레이션에서는 집조차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떨어질 것이기에 가져봐야 손해일 수밖에 없다. 소비도 줄고 그만큼 투자도 줄고 그러니 사회의 역동성도 줄어든다. 조용히 말라 죽어간다. 차라리 그보다는 활기찼던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대가 낫지 않을까. 그 시절의 꿈이라도 국민들에 쥐어주려 한다.


그냥 떠올랐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 뉴스를 보면서. 그리고 거기 딸린 일본 개헌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이들이야 말로 20세기 소년의 친구가 아닐까. 21세기에 20세기의 일본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1964년 일본의 부흥을 알렸던 도쿄올림픽의 기억을 소환하는 듯한 2020년의 같은 이름의 도쿄 올림픽이 더욱 그런 연상을 강화한다. 20세기 소년의 친구도 1970년의 오사카 박람회를 21세기에 옮겨 놓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예언이 아니었을까. 일본이 마침내 향하게 될 미래의 모습이었다.


다행히 아직 한국인들에게 과거란 경제뉴스마다 소환되는 IMF정도의 이미지나 가질 뿐이다. 자칫 더 나빴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나빴던 과거로 돌아갈 지 모른다. 그런 공포가 더욱 앞으로 내딛게 만든다. 아직 한국사회에는 그런 역동성이 남아 있다. 출산률은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졌어도 아직은 미래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 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난 30년간의 장기불황이 일본인들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일본인들의 정신을 얼마나 황폐케 만들었는가. 그래서 마르크스도 말했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정의한다. 맹자는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을 것이라 일갈했다. 일본사회의 보수화란 한 마디로 과거회귀다. 퇴행이다. 왜 하필 20세기 소년이었을까. 어쩌면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문득 떠오른 회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