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정이다. 사람이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다투고 화해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모든 과정이 결국 정인 것이다. 사랑해서 고통받고 사랑해서 구원받고 사랑해서 상처주고 사랑해서 또 치유받고, 그래서 대부분 이야기들은 사랑이야기들이다. 남녀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 혹은 그 이상의 그 이외의 모든 사랑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그러나 마침내는 행복해지는 사랑이야기다.
나라쿠란 요괴는 바로 그 정이 가지는 부정적인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그래서 상대의 감정도 배려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와 더불어 끝내 자신 또한 상처입고 만다. 그 상처가 독이 되고, 그 상처가 다시 칼날이 되고, 그리고 끝끝내 자기 혼자 남게 된다. 그마저 원망하고 그마저 후회하며 그러면서도 끝끝내 미련과 집착을 놓지 못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요괴란 인간의 일그러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정의 바다에 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며 찌꺼기인 것이다.
주제는 처음부터 일관되다. 키쿄우를 향한 이누야샤의 마음과 이누야샤에 대한 키쿄우의 마음과 그리고 이누야샤와 카고메가 만들어가는 그들의 관계와, 그리고 어쩌면 그런 가운데 너무나 일상적인 산고와 미로쿠의 사랑까지. 사랑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서로 만나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키쿄우도 고통 속에 죽지 않았을 것이고 다시 살아나 세상을 떠돌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사랑이니까. 사소하게 오해하고 사소하게 질투하고 사소하게 서로 다투다가 사소하게 헤어지고 사소하게 다시 돌아간다. 카고메의 힘은 그런 낙천에 있다. 그런 긍정에 있다. 자신의 어둡고 추하고 더러운 감정들까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함이다. 그러니까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쩌란 것인가.
그냥 추하게 사랑하면 된다. 어둡고 더럽게 사랑하면 된다. 다만 한 가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 나가쿠가 그토록 카고메를 두려워했던 이유이고 끝내 카고메에 의해 정화되고 만 이유다. 믿음이란 인정이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여겨도. 그러나 그런 상대마저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과 함께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한 내가 사랑하는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온전히 있어 줄 테니까. 마지막 카고메가 사혼의 구슬 안에서 시련을 넘어서 모든 인과의 사슬을 끊어내는 비결이었다. 정확히 이누야샤를 믿었다기보다 이누야샤를 사랑하는 자신을 믿었다. 이누야샤가 곁에 있는 동안 자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자신있게 해낼 수 있다.
솔직하지 못했으니까. 정직하지도 못했으니까. 설사 거절당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전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안 될 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고서 다른 대상을 통해 그 답을 구하려 한다. 자신의 한없이 이기적인 소원을 그저 조건없이 이타적으로 들어주는 이는 없다. 그런 주제에 마지막까지 솔직하지 못하고 위악만 부리다 스스로 사혼의 조각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안에서라도 서로 적으로나마 키쿄우의 영혼이기도 한 카모에의 영혼과 영원히 싸우며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일까. 그렇지만 카고메는 나라쿠처럼 비겁하지도 나약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사실 전투 부분은 그다지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이런 식의 능력자 배틀은 점프 쪽이 훨씬 체계화되어 있다. 너무 체계화되어 있어서 10권만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그림체 말고 작품의 구분마저 어려워진다. 철쇄아가 어떻고, 천생아가 어떻고, 마지막에 폭쇄아가 나타나고, 하지만 그런 것은 처음부터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터다. 만나고 사랑하고 서로 오해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헤어지가다도 다시 사랑하는 이야기다. 수백년을 살았어도, 이제 겨우 십수년을 살았더라도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혼의 조각을 완성하고서도 정작 나라쿠가 이루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나라쿠의 집착과 미련이 남긴 공허감처럼. 그는 무엇을 위해 태어나고 살았고 싸웠으며 그리고 소멸한 것일까.
후반 그림체가 불안정해진 것은 작가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때문이라 생각하려 한다. 하긴 원래 작가 자신이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늘어지고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거슬리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버리거나 남기는 것 없이 깔끔하게 완결짓는 것 역시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다카하시 루미코라는 이름만으로 주저없이 작품을 집어들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역시나 장기연재로 인한 잠시의 불만은 있어도 일단 완결되면 후회 같은 것은 없다. 사실 드물다. 장기연재를 하는 일본의 작가들 가운데.
가끔 만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애질 때가 있다. TV드라마도 그렇고, 게임도 마찬가지다. 취미와 관심분야가 끊임없이 바뀐다. 오로지 한 가지 일관된 것은 글쓰기 뿐이다. 그마저도 그때그때 관심분야에 따라 계속 주제가 바뀌고는 한다. 그때마다 블로그며 커뮤니티도 옮기고 해서 남아있는 것도 거의 없다. 딱 거기 걸렸다. 몇 년이나 걸렸다. 그 사이 다카하시 루미코 신작도 나온 것 같은데. 겨우 완결까지 볼 수 있었다.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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