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과 낙천은 오히려 좋기만 한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 좋을 때야 누구나 긍정적이 된다. 좋기만 하다면야 누구나 낙천적일 수 있다.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비로소 낙천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 희망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 때 그를 긍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페이소스라 한다. 오히려 슬프고 아프고 화나기에 더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그것을 또한 우리말로 신명이라 일컫기도 한다.
원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성급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에 항상 중요한 고비마다 멈춰서고 크게 뒷걸음치기도 하지만, 그런 한 편으로 누구보다 선하고 정의롭기를 바라며 희생적이고 헌신적이기도 하기에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의지와 용기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부정적인 면만 볼 것인가. 긍정적인 부분도 함께 볼 것인가. 부정과 긍정을 함께 봐야만 섣부른 기대가 실망으로 절망으로 뒤바뀌지 않는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뜨겁던 의지가 오히려 더 빨리 더 차게 식어 더럽혀지고 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냥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그런 인간마저 긍정한다.
양진만을 가질 자격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양진만이 그런 국민들에 맞추지 못한 것 뿐이다. 병법 36계의 계명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가치부전일 것이다. 차라리 거짓으로 어리석음을 꾸밀지언정 미친 놈은 되지 마라.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한 쪽 눈은 감거나 가리는 것이다. 모두가 미신을 믿고 따른다면 그에 맞춰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는 것이다. 도로에서 모든 차들이 역주행하고 있다면 그것이 올바른 방향인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잘못임을 알면서도 맞추려고만 하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딱 반 걸음만. 뒤따르는 사람이 내 모습을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도록 보이는 반걸음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아무리 방향이 옳아도 혼자서만 앞서가면 뒤따르는 사람들과 거리만 멀어질 뿐이다. 결국 함께 가고자 하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모두의 앞에 서고자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다음 정권으로 넘기기로 결정한 장면은 박무진이 현실정치인으로 각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홀로 가지 않는다. 모두를 내버려두고 혼자서만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쫓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따라줘야 옳은 것도 옳은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설득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권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정당에 가입해야 한다. 과연 의회가 자기 당 소속도 아닌 대통령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나서줄까. 현대의 전장에는 더이상 영웅이 없다. 고도로 발전된 현대사회에 더이상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수없이 많은 다양한 주장과 이상과 신념과 견해와 이해와 갈등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고 그에 대한 최대한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그를 힘으로 현실로 이루어낸다. 어떻게 자기 편을 늘리고 그들의 지지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아직 이런 수준의 정치가 어울린다. 그러나 누가 결정하는가? 주권자인 국민에게 자격이란 것이 있는가?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은 뒤 일방적으로 강제한다. 그냥 복수다. 그조차도 아닌 분풀이다. 자신의 좌절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실망과 절망에 대한. 허튼 머리로만 떠들어대는 정의의 한계다.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었다. 현실 정치인 가운데도 한때는 누구보다 순수하고 뜨거웠을 혐오스러울 정도로 타락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빈틈을 비집는다. 그런 절망과 혐오가 모인 집단이었을 것이다. 하필 그 배후가 킬러와 일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냉전질서를 다시 되돌려 유지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국을 보고 그리 내용을 수정한 것일까?
해보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들이 생겨났다. 권력을 실제 가지고서 그 권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더 크게 일어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없던 권력의지도 전혀 다른 자리에서 다른 풍경들을 보면서 어느새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모든 이들이 이미 가고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다만 이번에도 역시 미친 놈으로 남을 것인가. 그저 함께 바보가 되어 아주 조금만 더 똑똑해지고 말 것인가. 대중을 거스르는 정치는 의미가 없다. 때로 실망하고 때로 절망하면서도 그러나 역사의 진보를 믿고 묵묵히 앞으로 나가는 것. 잠시의 후퇴와 퇴보마저 기꺼이 긍정으로 낙천으로 인정하며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는 그것을 배울 수 있었을까.
너무 그린 듯한 인물이라 실감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에피소드는 현실감이 상당히 떨어진다. 어차피 없을 것이란 것을 안다.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철저히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판타지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던 것은 드라마에서나마 그런 정치와 그런 정치인을 바라는 마음이 모두에게 이미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위기와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연꽃과 같이 순수한 깃발같은 존재가. 지진희에게는 그야말로 인생배역이었을 것이다. 선하지만 약하지 않은, 정의롭기에 오히려 더 단호할 수 있는 외유내강의 리더다. 모두의 앞에서 등을 보여주며 걷는 이다. 그런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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