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 같은 것이 있다. 당연한 것이 값비싼 보석을 샀으면 남들에게 보여 자랑하고 싶은 것이고, 좋은 차를 탔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달리며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만큼 큰 권력을 가졌다. 내가 이만큼 크고 존귀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거스른다?
권위적인 조직일수록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보다 높은 사람에게 얼마나 복종하는가가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게 된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높은 사람에게 밉보여서는 의미가 없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모순된 지시라도 그대로 따르고 실패하는 쪽이 그를 거스르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다. 만일 진짜 일을 잘하고 싶다면 인정받기를 포기해야 한다. 미움받기를 각오해야 한다. 언제고 내쫓길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떠날 결심을 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쩌면 그동안 백승수가 단장으로 있던 팀들이 하나같이 우승과 함께 해체된 데에는 백승수의 이같은 방식도 한 몫 했을 지 모른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용상 허점이 있다. 백승수가 그동안 거쳐 온 팀들 역시 기업에 속해 있었으니 권경민이 그러려고 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우승도 하고 해체까지 하게 되었는가 세세한 과정까지 모두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마저도 드라마를 위한 장치였던 것일까. 권경민이 일부러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거나 팀이 우승하기까지 윗선으로부터 철저히 밉보인 백승수로 인해 괜한 주변사람들까지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더욱 냉정하게, 더욱 매몰차게, 더욱 싸가지없게, 오로지 모든 관계를 일로써만. 그것이 백승수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권경민이 구단 사장이 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백승수를 압박하려 하고, 백승수는 그런 권경민의 압력을 최대한 회피하며 저항하려 한다. 약속한 시간까지만. 자기가 계획한 우승을 노려 볼 만한 전력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만.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팀들을 우승까지 시킬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하나같이 모든 팀들은 해체란 결과를 맞게 되었다. 그러면 그동안 팀들의 구성원들은 백승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고마워하고 있을까? 마지막 열쇠가 될 지 모르겠다. 그동안 백승수가 그 팀들에서 해 온 일들은 구성원들에거 어떤 의미로 남았을 것인가?
자기 팀의 선수인 강두기를 믿었다. 믿었기에 의심했다. 신뢰를 확인하기 위한 의심이다. 김종무 단장의 신뢰와 결이 다르다. 더 확실하게 믿기 위해 한 번은 의심하고 거리를 둔 채 사실을 확인한다. 의심하기 위해 의심하는 사람과 믿기 위해 의심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믿기 위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계약서라는 것이 존재한다. 법이란 서로 믿기 위해 의심하는 가장 구체적인 예일 것이다. 그래도 법이 있으니 상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다. 사실은 김종무 단장의 경우 역시 불신의 한 표현일 것이다. 확신이 없기에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임동규를 불러서 물었을 때나, 선수들을 모두 모아놓고 연설을 할 때나 전적으로 믿고 마음놓는 모습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어쩌면 가장 비겁하지 않았을까.
신인시절 강두기와 임동규의 인연과 우정이 꽤 흥미롭다. 한 사람은 모두가 주목하던 1순위 유망주였고 한 사람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후순위의 그저그런 신인이었었다. 하지만 목표는 같았다. 과정 역시 같았다. 죽어라 노력하는 것.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하는 것. 편법같은 건 쓰지 않았었다. 확실히 도박과 약물은 그 결이 다르다. 도박은 경기장 밖의 문제고 약물은 경기장 안의 문제다. 야구에 관한 한 그들은 절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오만할 정도로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는 최선만을 다 할 뿐이다. 자신은 그만한 자격이 된다. 자신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다. 다만 그런 자부심이 잠시 잘못된 방향으로 드러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누구보다 성실하고 엄격한 강두기와 한 편으로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임동규가 원래는 닮은 꼴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야구란 스포츠를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아니 모든 스포츠에 대해 한 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을 것이다. 죽도록 야구에 미쳐 있다.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야구란 스포츠에 미쳐 있다. 뿐만 아니라 팀에 대해서도 미쳐 있다. 자신이 최초 소속된 팀에서 은퇴할 수 있기를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었던 두 선수 모두 간절히 목말라하고 있다. 어느 팀에서든 최고의 대우를 약속받을 수 있는 두 선수지만 그러나 우승과는 한참 거리가 먼 팀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바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 임동규를 위해 백승수는 다시 쉽지 않을 바이킹스와의 협상에 나서고자 한다.
확실히 백승수는 김종무 단장에게 몹쓸 짓을 했을 것이다. 임동규의 원정도박 사실을 알고서도 숨기고 트레이드를 했었다. 당시까지 백승수와 김종무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미안함에 바이킹스의 약물의심 선수들에 대해 사전에 정보를 주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었다. 기껏 우승을 위해 데려온 임동규가 원정도박으로 경기에도 제대로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임동규마저 다시 데려가려 하고 있는 중이다.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에게만 좋은 사람이고자 한다. 나머지 모두로부터는 비난과 조롱을 받더라도.
굳이 야구가 아니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라는 스포츠이기에 더욱 특별한 것일 수 있다. 인간과 조직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단장으로서의 리더십이며 또한 월급쟁이들의 애환이기도 하다. 그래봐야 계약직 월급쟁이 아닌가. 나보다 한참 더 많이 받기는 하지만. 애닲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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