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복 감독이 마속이었던 것일까. 어째 불안하기는 했었다. 드라마의 패턴이 반전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너무 좋은 장면만 나오면 반드시 나쁜 쪽으로 결말이 나는 경우가 많았었다. 기껏 제갈량이 기만과 기동으로 무도 음평을 무난하게 장악했는데 마속이 지시를 무시하고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는 바람에 가정을 내주며 어쩌면 거의 유일했을 북벌의 기회를 날리고야 말았다. 강두기에 임동규까지 돌아오며 모두가 희망에 차 있었는데.
비로소 믿게 되었다.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망상이라 여겼던 가을야구의 꿈을 프론트며 선수들 모두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강두가기 20승 하고, 비록 절반밖에 못 뛰지만 임동규가 남은 경기에서 20홈런 쳐주고, 다른 선수들도 작년보다 더 열심히 더 잘하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단장은 팀을 만들고 감독은 경기를 책임진다. 어쩌면 아직 많은 대중들에게 생소할 프로구단에서 단장의 역할을 너무나 잘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스토브리그는 단장의 시간이다. 다음 시즌을 대비해서 팀을 설계하고 구체적으로 완성해간다. 그리고 그 결과 팀 전체가 다음 시즌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반전이 심지어 뜬금없기까지 했던 것이다. 드림즈의 선수들과 거의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뭔가. 왜 이 시점에 강두기가 트레이드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도 단장을 거르고 감독과 사장의 전결만으로. 다음 시즌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던 순간 마치 얼음물을 끼얹듯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만다. 바로 백승수와 이세영을 통해 윤성복 감독의 장점이 나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저 착하기만 해서 거절도 못하고 반대도 못하고 야단도 못치는 그런 무지렁이 무능한 감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다른 내용은 싹 머리에서 날아가 버린다. 마치 내 팀인양 강두기가 트레이드된다는 소식에 이제까지의 내용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래서 강두기 없이 어떻게 다음 시즌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다른 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가을야구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선수와 프론트가 가졌던 희망들은? 그 간절한 기대들은? 어쩌면 한국 프로스포츠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봐야 팬들의 팀도, 선수와 프론트의 팀도 아닌, 그저 모기업 오너의 팀에 지나지 않는다. 팬들이 뭐라 하든, 선수와 프론트가 뭐라 떠들든, 오너가 결정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은 오로지 모기업으로부터만 나온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어떻게든 이겨보겠다 발악하며 발버둥쳐도, 그러나 모기업의 지시를 받은 사장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이렇게 어이없이 결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행태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분위기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단주라면 구단에 대한 모든 결정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 구단주로서 당연히 구단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할 테지만, 그러나 그런 전제마저도 너무나 우습게 깡그리 무시해 버린다. 하긴 그래도 대기업의 경영권을 승계한 혈족이 기업에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던 행위마저 경영의 자유라며 옹호하는 것이 이 나라의 언론이고 지식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승수와 권경민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백승수는 그런 기업의 구조 바깥에 있고 권경민은 그 안에 속해 있다. 이제와서 권경민이 백승수처럼 못해먹겠다고 때려치고 다른 회사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회장의 조카이고, 회사의 중역을 맡아 온 회장의 일가인 것이다.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비로소 구단 사장으로 좌천되면서 그 사실을 깨닫는다. 자기가 선 위치를. 자기가 나가야 할 방향을. 차라리 자기가 아무 상관없는 전문경영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회장의 일가란 혜택인 동시에 족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백승수도 알면서도 이해 못하고, 그런 백승수를 권경민도 이해하면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 서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연민하면서 그렇게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특히 권경민에게 있어 백승수와의 대결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회장으로부터 다시 인정받는 것을 떠나 지금까지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백승수를 좌절시킴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그럼으로써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설사 결과가 그렇게 되더라도 생각처럼 통쾌할 것인가. 아니 그런 기대조차 없는 지 모른다. 권경민 자신도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심술과 같다. 어쩌면 백승수에 대한 권경민의 응석일 수도 있겠다.
갑이 갑을 만들고, 그렇게 을이 다시 갑이 되어 을을 갑으로 만든다. 그렇게 층층시하 갑과 을이 쌓이고 겹쳐간다. 어디선가는 을인 이들이 어디선가는 갑이 된다. 을이 갑이 되면 더 지독한 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역시 이 드라마는 권경민과 백승수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희망의 순간 급전직하 모두를 절망으로 내몬다. 겨우 하루를 기다려야 하니 다행이다.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윤성복 감독의 변명은 듣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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