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드라마라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일들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일들이 일어나거나. 비일상적인 공간과 비일상적인 일들을 너무 멀고 낯설기만 하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일들은 너무 평범하다. 그래서 어렵다. 그런 이야기들을 다수의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게 쓰고 만들기가. 그런 점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일상을 위장한 비일상적인 세계의 첩보원 이야기는 아주 흔한 이야기의 소재로 쓰여 왔었다.
첩보물에서 정보기관은 흔히 회사라 불린다. 말 그대로다. 딸 하나를 혼자서 낳아 기르는 미혼모에게도, 결혼한지 벌써 십 수 년이 지난 생활에 찌든 중년의 아줌마에게도 국정원이란 생활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애국심도 있고 사명감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그래도 공무원으로 안정된 직장을 지켜야 한다는 동기가 더 강하다. 덕분에 현장이라고는 나가 본 적 없는 지원전문의 초보자와 오랜동안 현장에서 멀어져 있던 베테랑이라기보다 퇴물에 가까운 내근전문이란 설정이 빛을 발한다. 도대체 국정원 정보원이라는 것들이 어찌 저리 어설플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고 첩보물로써 하드보일드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설픈 첩보원들과는 달리 악역들에게는 웃음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웃더라도 악의와 음모를 뒤에 감춘 썩은 내 나는 웃음일 뿐이다. 마치 빛과 어둠의 대비를 보는 것 같다. 평범한 일상이 어울리는 밝은 세계의 이들과 평범한 일상따위는 없을 것 같은 어두운 세계의 그들이 서로 대비되어 보여진다. 그리고 밝은 세계에 속한 주인공들이 그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 어설픈 헤프닝들을 만들며 그 음모를 파헤쳐간다. 어설플 수밖에 없다. 그곳은 그들이 속한 세계가 아니다.
대부분 현장에서의 에피소드라는 것도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아직 일에 서툰 신입직원이고, 어느새 나잇살이 불어 버린 아줌마였다. 어쩐지 그래서 어설프고, 덕분에 항상 굴욕의 연속이다. 주인공인 백찬미보다 임예은이나 황미순에게 더 눈길이 가는 이유다. 백찬미는 너무 잘났다. 그야말로 비일상의 첩보세계에 어울리는 비일상의 인물일 것이다. 사실 백찬미가 활약하는 장면에서 슬로우비디오가 나올 때마다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고 딴 짓을 한다. 지루하다. 그에 비하면 이런 게 국정원 요원인가 싶을 정도로 어설픈 짓거리를 할 때마다 얼마나 민망할 정도로 우스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혹은 첩보의 비일상이 일상으로 이어졌을 때는 그보다 어울릴 수 없을 정도다.
별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다만 일상의 파트가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평범한 중년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듯한 황미순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임예은은 처음 나간 현장에서 또다른 일상과 만나고 있다. 직장생활이 쉽지만 않다. 아직 자리도 잡기 전인 신입에게 지워진 짐은 너무 무겁고, 한류스타란 감당하기 너무 버겁다. 그래도 다시 현장의 하드보일드로 돌아갈 것이라는 건,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겪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서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과연 어둠속에 숨은 마이클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너무 빨리 백찬미와 요원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 역시 흔한 클리셰다. 처음부터 예고되었다. 마이클이 국정원의 작전을 꿰뚫고 오히려 역으로 함정을 파서 요원들을 제거하는 모습에서 분명 국정원 내부에 그와 내통하는 배신자가 있을 것이다. 실제 작전을 지휘하는 국장이 누군가를 만나 정보를 빼돌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관수가 임예인을 구하러 출동했다 오히려 총까지 맞는다. 진지할 때는 진지한 것도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다. 전혀 의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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