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드라마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서도 잊을 수 없었던 남자와 기억할 수 없었던 여자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설정부터가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순간을 잊을 수 없어 매번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억하지 못하게 된 여자가 만나서 우연히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 그들은 기억할 수밖에 없고, 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게 될까?
그러고보면 만화도 연재가 오래 이어지다 보면 처음 설정이 어떠했었는지 작가 자신부터 헷갈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정확히는 처음 설정이야 어떠하든 관성에 의해 그저 되는대로 이야기를 붙여 나가느라 나중에는 아예 상관없어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의외로 많다. 드라마 가운데도 적지 않다. 원래 가장 어려운 것이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 채워나가는 것일 게다. 그나마 쉬운 것이 평범하지 않은 비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 채우거나, 혹은 거꾸로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은 비일상의 이야기로 채우는 것이다. 여기서 대부분 문제들은 발생한다. 사실은 설정 그대로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는데 결국 그 이상을 바라게 된다.
드라마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 두 사람의 이야기보다 스토커의 이야기가 더 전면에 배치되면서부터였었다. 그렇다고 스토커를 추적하고 잡는 이야기가 흥미로울 만큼 새로웠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억지로 이런저런 캐릭터며 에피소드를 등장시켜 긴장을 고조시키려 하는데, 정작 그러는 사이 두 사람 사이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뒤로 묻혀 버렸다. 어떻게 기억하고 기억할 수 없는, 잊었고 잊지 못하는 두 사람이 같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사이에 두고 충돌하고 갈등하며 마침내 서로와 자신을 위한 답을 찾아 갈 것인가. 그런 점에서 스토커의 존재는 굳이 두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지 않아도 되는 외부에서 가해진 충격이었고 촉매였었다. 굳이 그런 과정 없이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면 그냥 평범한 아나운서와 연예인이었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지금에 와서는 어째서 이정훈이 과잉기억증후군이어야 했고, 여하진이 친구의 기억을 잃었어야 했는지 굳이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할 지경이다. 이정훈의 과잉기억증후군은 드라마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여하진의 기억상실은 어떤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가. 상관없이도 두 사람은 잘 만나고 잘 사귀고 있다. 그나마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잊지 못하는 연인의 소중한 친구였고, 그 친구의 연인이었다는 사실 뿐이다. 과잉기억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잊지 못하고 기억할 수 있고, 기억상실이 아니더라도 상대에 대해 모를 수 있다.
평범한 연애드라마로서는 그다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런 흔하고 평범한 드라마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흔하고 평범한 드라마일수록 더 정교하고 치밀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뻔하게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는 이야기만 가지고서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와 만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는가. 그런 특별함이 없다. 가장 큰 문제다. 이제 와서 어떤 장점도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취향이 아니란 뜻이다. 뒤늦게서야. 안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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