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오래된 밴드들을 보면 눈물겨울 때가 있다. 나이를 먹은 만큼 손도 무뎌지고, 박자감각도 둔해지고, 당연히 보컬의 목소리도 잘 안 올라간다. 힘겨워서 허덕거리며 간단한 코드조차 틀리는 밴드들을 보면 그만큼 세월이 흘러갔구나. 그런데도 그런 아쉬움들마저 세월과 함께 하나로 녹아드는 것이 과연 밴드란 것이구나.
틀리면 틀리는대로 맞춰가고, 못하면 못하는대로 또 맞춰가면서, 그런데도 그마저도 모두 하나의 소리로 녹여낸다. 그마저도 밴드의 개성이 되는 것이다. 잘해서 밴드가 아니라 함께하니까 밴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노래를 잘해서 가수가 아니다. 기타를 잘쳐서 기타리스트가 아니다. 연주를 잘하니까 밴드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계속해서 내 자리를 지키는 것. 연주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모두와 함께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채송화는 노래를 못해야 했던 것이었다.
굳이 슬의의 친구들이 밴드를 해야 했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함께 '나에게 넌'을 부르는데 채송화의 어이가 없을 정도의 노래에도 서로 함께 웃으며 맞춰갈 수 있었던 부분에서. 연주는 아니었을까. 그래도 아마추어인데 모두의 연주가 과연 항상 완벽하기만 했을까. 아마 자주 틀렸을 테고, 어디선가는 실력이 미치지 못해서 적당히 타협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 이건 안되네. 그러면 이건 어떨까? 그 부분은 내가 맞춰줄게. 원래는 기타솔로인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베이스가 대신하기도 한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함께 모여서 함께 연주하고 함께 노래하는 것만으로. 그런 때가 되지 않았는가. 서로 잘나고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가 좋은 그 순간.
물론 죄다 잘났다. 그 나이에 벌써 하나같이 조교수 직함을 달고 있다. 하나같이 실력을 인정받고 주위의 존경까지 받고 있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의사라는 직업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병원이란 공간은 나중이라 말했던 것이다. 아니 아니다. 병원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의와 직업의 윤리가 집단에서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어쩌면 매우 흔치 않은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가 욕망을 추구하며 경쟁해야 하는 다른 공간에서 그들은 그렇게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사기업이었다면. 혹은 공공기관이었다면. 의사니까.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성공도 하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모두들 그리 의사를 바라는 모양이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라면 하나를 먹으면서도 그리 서로 다른 개성들이 드러나고 만다. 그래도 친구이지 않은가. 아마도 그동안 싸우기도 많이 싸웠을 테고, 한 두 번은 절교도 진지하게 선언해 보았을 것이다. 아예 연락도 않은 시간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래서 성형에게 헤어진 전부인이 전화를 건 것일까. 먼 길을 돌아서 채송화에게 고백했던 익준처럼. 그러면서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나이란 것이다. 후회하기에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용감한 것이 아닌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라 더 진실할 것이다.
겨울정원은 참 아름답다. 모두 알고 있었다. 이익준이나 채송화나. 안정원의 한 마디에 바로 채송화는 창문을 열고 겨울부터 떠올리고 만다. 항상 가까이서 지켜 봐 온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석형에게 추민하와의 관계를 권유하면서도 이익준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겨울은 아니다. 처음부터 이익준은 장겨울과 안정원의 사이를 이어주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추민하에게는 아직 너무 멀고 험한 길이 남아 있다. 저렇게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서 옆자리를 채워주는 추민하야 말로 양석형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일 수 있을 테지만.
처음 대학생이 되었을 때 만나서 무려 20년을 함께 해 온 그들이었었다. 그만큼 속속들이 알고 그래서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가깝다. 아무렇지 않게 깊은 속을 털어놓고, 설사 아무말 하지 않아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냥 음이 저멀리 떠나버리면 그마저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노래를 해보겠다고 날달걀을 깨 먹으면 질색을 하면서도 그냥 웃으며 그 곁을 내어 줄 수 있다. 부러운 것일까? 아니면 그리운 것일까?
시즌2에 대한 약속이 그래서 정말 고맙다. 이어진 겨울정원을 볼 수 있고, 익준의 고백을 받은 송화의 이야기도 기대해 볼 수 있고, 전처의 전화를 받은 석형의 선택들을 지켜볼 수 있다. 익순과 준완은 그 먼 사랑을 계속해서 흔들림없이 이어갈 수 있을까. 추민하는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늦게 시작해서 겨우 다 볼 수 있었다. 벌써 그리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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