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중국 역사드라마의 한계 - 대의와 명분에 대한 고찰

까칠부 2021. 9. 9. 05:31

대의와 명분은 흔히 같이 쓰이지만 서로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해야 한다. 대의다. 그러면 그를 위해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대부가 왕을 넘봐서는 안되고, 백성이 대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할 수도 없고, 남의 아내를 내 아내처럼 아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명분이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러니까 왕이 되어 무엇을 대의로 삼으려는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다스리려 하는가? 그를 위해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어떤 구체적인 방편을 찾으려 하는가? 그런 가치의 충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시기가 바로 우리 역사에서 여말선초였을 것이다. 과연 신하로써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백성을 위해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바로세우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하는가?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정몽주였고, 후자를 대표하는 것이 정도전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더라도 정당한 군주 아래에서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며 그 방편을 찾아야 한다. 신하로써 군주에게 충성하려 한다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에 걸맞는 군주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래도 한국 역사드라마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에 비해 나은 부분일 것이다. 특히 중국 역사드라마가 보여주는 스케일과 깊이에 비해서도 절대 밀리지 않는 절대의 강점일 것이다. 별 하잘것없는 근본없는 퓨전연애드라마에서도 나라와 백성이라고 하는 근본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이란 어떤 나라여야 하고, 그를 위해 왕과 신하들과 선비들과 백성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인가? 왕의 나라인가? 아니면 백성의 나라인가? 그런데 중국 역사드라마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시대를 배경으로 치열한 정치싸움을 그려내고는 있지만 대개는 개인적인 은원이나 혹은 혈연의 정당성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은 어째서 태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이 사람은 어째서 군주에 어울리는 인물인가? 그저 인품이 훌륭하고 재주가 뛰어나고 전공을 많이 세운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비열한 술수를 동원한 왕위다툼이 그 내용의 주류를 이룬다.

 

어쩔 수 없다. 공산당 일당독재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당독재가 시진핑 이후에는 일인독재로 바뀌었다. 자칫 중국공산당이나 시진핑의 방식과 충돌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예전처럼 황건기의라며 황건적의 봉기를 핍박받고 착취당하던 무산자 농민들의 투쟁이라며 포장하는 것도 더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고, 그에 근거한 명분이다. 그래서 누구의 아들이거나, 누구의 형제이거나, 그러므로 누군가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더욱 중국 역사드라마들은 화려한 귀족문화를 자랑하던 당송이전의 시대를 선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대부들은 천하의 대의에 대해 고민하던 이들일 것이다. 그 대의를 위해 때로 명분도 잠시 뒤로 미룰 수 있는 이들이었다. 반면 귀족들의 시대에는 귀족이라는 명분이 천하라는 대의에 앞서고 있었다. 아무리 왕조가 바뀌고 황제가 갈리더라도 귀족들이 누리던 기득권에는 변화가 없어야 했다. 귀족은 여전히 귀족이어야 했고, 천하는 여전히 귀족을 위한 천하여야 했다. 백성이란 단지 그런 귀족을 위한 귀속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치란 그런 귀족 가운데 누가 권력을 가져가느냐 하는 명분의 싸움일 뿐이다.

 

그저 눈으로 보기에나 화려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제한없이 비열한 술수들이 난무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정도이고 무엇이 대의인지 그러므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선과 악의 구분도 없고, 따라서 때로 주인공이 더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마저 흔하다. 그마저 복수라는 명분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오던 위화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내가 중국 역사드라마에 깊이 빠지지 못하는구나.

 

처음 몇 편 정도는 신기해서 재미있었다. 한국 역사드라마와는 다른 방식들이 참신하고 신선하게도 여겨졌었다. 선과 악을 뒤섞는 것은 한 편으로 입체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드러나는 것은 대의가 없는 얄팍함이다. 명분을 대의로 포장하는 편협함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중국의 현실이다. 지금의 중국공산당보다 귀족시대의 귀족과 닮은 지배집단이 중국 역사에 있었을까. 그리 느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뭐 그들 사정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