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 해 우리는 - 국연수의 이유, 가난이라는 부자유의 원리

까칠부 2022. 1. 9. 09:50

국민학교 아마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니 2학년 때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처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내 도시락 반찬이 무말랭이, 그것도 뭘 담았는지 모를 유리병에 담아 싸간 것이었다. 아이들이 웃더라. 다들 햄이며 소시지며 계란이며 참 맛난 것들도 싸가지고 왔는데.

 

당시 내 체육복이 나일론제였었다. 아마 그게 뭔 의미인가 아예 이해 자체가 안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나일론은 질긴 대신 열에 약하다. 엄마가 빨래한다면서 체육복을 같이 넣고 삶는 바람에 아예 쭈글쭈글 주름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 입고 무려 1년 넘게 학교에 다녔었다. 나중에는 그렇지 않아도 쭈글쭈글한 체육복이 손발 다 드러나고 그런 꼴불견이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같은 반 친구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드라마를 보다 말고 이런 글을 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나 역시 비슷했다. 아이들이 흔히 입고 신고 다니는 유명브랜드? 그런 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중학교 1학년 때는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를 교복자율화 이전의 교복바지를 입고 다니다 같은 반 녀석들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옷을 어디서 얻어서 입고 다닌다더라. 참 웃으며 씹고 다니기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나는 지금도 특히 패션브랜드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입을 수 있으면 족하다.

 

TV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흑백이었을 것이다. 전에도 썼을 텐데 집에 카세트 플레이어도 없었다. 라디오도 길가다 누가 버린 걸 주워서 대충 고쳐서 듣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었다. 대화가 통할 리 없다. 내가 오래전 한국에서 록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를 연재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결국 록이란 한국에서는 있는 집 자식들의 자기과시에서 시작되었다는 맥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내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창구란 가요톱텐이 거의 전부이다시피 했었다. 그런 나와 주위의 녀석들과 대화가 통할 리 있나.

 

내게 주어진 용돈으로, 내가 쓸 수 있는 비용으로 거의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바로 만화였었다. 내가 만화를 좋아한 이유였다. 만화책은 동전 50원만 있으면 한 권을 빌려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만화책 한 권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2시간이었다. 오락실 오락은 엄두도 못냈다. 같은 돈 50원으로 처음 하는 오락이면 채 1분도 지나기 전에 끝내야 했다. 

 

돈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인간은 물질계에 존재하며 인간을 정의하는 것도 역시 물질이다. 벌써 국민학교 시절부터 내가 주위 녀석들과 제대로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하필 쓸데없이 공부를 잘하는 바람에 나와 말이 잘 통하는 하류층 녀석들과는 성적 때문에 거리가 있었고, 학교에서 비슷한 취급을 받던 녀석들과는 사는 세계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았다. 물론 노력하면야 어떻게든 맞출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고단한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냥 포기하자.

 

나는 이렇게 절박한데. 나는 이렇게나 현실이 고단한데. 그런데 아닌 녀석들이 있다. 우리집 한 달 생활비가 고작 녀석의 옷값으로 쓰인다. 나는 만화책이라도 한 권 더 보겠다고 1시간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하는데 녀석은 아버지가 차에 태워 등하교까지 시켜준다. 어떤 녀석은 같은 만화가 취미인데 아버지가 일본에 사업차 자주 들락거린 탓에 최신 일본만화를 그냥 당연하게 집에 구비하고 자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좋아라 얻어타고 얻어보고 얻어먹고 얻어입고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나는 절대 저들과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래서 내 오랜 친구들은 성인이 되고 만난 친구들이다. 내가 어느정도 나 자신의 실력으로 경제적인 자유를 얻고 난 뒤에 사귄 이들이다. 전에는 없었다. 일단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하는 말을 놈들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게 계급이다. 하나의 사회 안에 서로 다른 복수의 세계가 존재한다.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마저 다르다. 저들은 나와 같은 인간인가? 별개의 외계의 존재들인 것인가?

 

국연수와 최웅이 헤어지게 된 이유를 보면서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저렇게도 사랑하던 사람들은 헤어진다. 절친했던 친구들도 멀어진다. 그래도 서로 말이 통하던 녀석들이 좀도둑질에 폭력에 결국 범죄를 당연하게 여기는 길로 들어서면 나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 혹은 배움을 포기하고 현재에 만족하려 한 순간 나는 그들과 같은 선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놈들과 비위맞춰가며 같이 놀고 있을까?

 

내가 한국 진보들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잠시 어울려 보고 알았다. 저놈들은 그때 그놈들과 달랐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며 다른 언어를 쓰던 그놈들과 너무 닮아 있다. 어째서 너는 그토록 천박한가. 무식한가. 비루한가. 내가 사는 현실은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너무 다르니까. 아마도 그들이 위한다는 도덕적이고 선량한 사회적 약자들이란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미지일지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같이 매점에 가겠다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 몇 번 사주는 걸 얻어먹고 돌려주려는데 그마저 너무 초라하고 어설프다. 아니 돌려줄 수조차 없다. 나 역시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에게 얻어먹고 빌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선의가 오히려 부담으로 고통으로 돌아오게 된다.

 

허영만의 만화 '타짜'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일 것이다. 사랑이란 구라다. 자기를 속이고 상대를 속인다. 세상 근심걱정없이 여유로운 최웅을 부러워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마저 그를 닮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현실을 잊으려 도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엄혹한 현실만 남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신만 더 초라하다. 그런 순간에도 다른 이를 챙길 수 있는 최웅에 비해 국연수는 자기 앞가림도 버겁기만 하다.

 

긴긴 시간을 지나 겨우 국연수도 최웅과 비슷한 선상에 서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아직 상당항 격차가 있지만 그래도 전에 비해 그로 인해 옭죄는 부자유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6화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와 다른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때처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랬다면 나 역시 지금처럼 혼자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인가.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기회와 가능성은 또한 얼마나 될 것인가.

 

무심하지만 절절하다. 아마 작가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듯하다. 가난이 어떻게 인간을 피폐케 비루하게 타락시키는가. 가난하지만 선량하다. 가난하지만 도덕적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가난은 또한 그래서 저들에게 있어 소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절박한 현실이었음에도. 이해하게 되는 이유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