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여성주의자들은 이런 드라마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가난을 극복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난에 치여 절망에 짓눌리다가 남성을 만나 구원을 받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며서 이런 드라마는 그저 무심하게 지나간다.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여성은 배려되어야 하는 존재다. 여성은 감정의 존재다. 감정에 지배받는 타율적 존재다. 오로지 남성만이 이성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
가난한 여성은 없다. 가난한 것은 여성이 아니다. 당연히 노동하는 이들도 여성이 아니다. 한국 여성주의의 한계다. 한국의 여성주의는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김학의의 무죄에 반발하는 여성주의자가 없는 이유다. 김학의를 수사했다고 오히려 기소당한 검사를 비난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려 사법고시에 합격한 명문대 출신의 검사들이 무혐의라 결론냈으므로 김학의는 무고하다.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김학의를 수사한 검사들을 오히려 비난할 수 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힘없는 여성들이었다. 가진 것 없는 여성들이었다. 법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여성만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방지 기자들에 대한 성추행이나 성희롱은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행위들인 것이다.
여성은 그저 감정적이기만 한, 그저 자신의 이기만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로만 그려진다. 그런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남성의 역할이다. 한 17세기쯤 쓰여진 원작을 드라마화한 것인 줄 알았었다. 뭐 이런 시대착오적인 드라마가 있는가.
내가 여성주의를 혐오하게 된 이유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반감을 가진다. 이런 여성을 옳지 않다. 바람직하지 않다. 이야말로 여성혐오적인 드라마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는 비판하던 여성주의가 이런 드라마에는 관대하다. 이유는 무엇인가?
1980년대 여성주의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에 반발하던 1990년대 어떤 여성주의자들을 기억한다. 그 가운데는 내가 사랑하던 이도 있었다.
한국 여성주의는 지금 어디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여성주의에 여성이란 존재하는가.
안희정 사건 당시 나는 철저히 피해자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김건희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은 감싸기 급급하다. 여성주의가 존재해야 할 이유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여성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새삼 확인한 사실이다. 여성주의란 가짜고 거짓말이다.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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