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에 대한 내 해결방법은 오래전부터 하나였다. 평화 아니면 전쟁. 과연 그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전쟁나면 너는 무사하겠는가? 그러면 전쟁나서 내가 더 나빠질 건 무얼까? 어차피 현실은 내게 그리 녹록치 않다.
대선을 앞두고 한 후보가 전쟁을 공약했다. 북한을 선제타격하겠다. 당연히 선제타격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발적으로라도 확전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가장 먼저 전장으로 끌려갈 20대는 그런 후보를 지지하는가? 차라리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세상이 뒤집어지면 다른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는가.
19세기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처음으로 전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젊은이들이 열광하며 입대를 자원한 이유도 비슷했었다. 전쟁은 기회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가운데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길 것이다.
죽은 적의 물건을 빼앗는다. 패배한 적 민간인의 재산을 정당하게 훔친다. 죽이고 강간하고 파괴하고 그리고 약탈하여 자신의 배를 불린다. 혹은 전쟁에서 죽은 이들의 자리를 자신이 대신할 수도 있다. 내 위에 부장이 죽으면 어떨까? 아니면 나를 제치고 대기업에 입사한 놈들이 뒈지면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현실은 시궁창이다. 자신의 미래란 지욱의 경계에 있다. 더 나빠질 것이 없다면 아예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도 크게 손해날 것은 없다.
그러니 차라리 전쟁하자. 죽이고 부수자. 강간하고 약탈하자. 도대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얼마나 절망속에 살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 전쟁의 피해자일 여성들조차 전쟁을 지지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
학교가 지옥이 된다. 모두가 좀비가 되고 파멸해간다. 그러나 차라리 그런 비극이 누군가에게는 후련하다. 다 죽고 모두가 파괴되어 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옥조차 현실에서 희석되어간다.
드라마를 보면서 깨닫는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었다. 다 죽자. 다 부수자. 그러니 차라리 전쟁을 하자. 그래서 20대는 자신이 죽을 수 있음에도 전쟁을 지지한다. 전쟁이란 기회다. 일탈이다. 해방이다.
지옥은 어쩌면 더 큰 절망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일 수 있다. 죽을 용기로 죽는 것이 아니다. 살 용기가 없으니 죽음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20대의 절망을 본다. 차라리 죽기를 바란다. 파괴되기를 바란다. 뒤집히기를 바란다. 그러니 때로 그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이 뒤집히면 차라리 만족할 수 있을까.
좀비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이유일 것이다. 절망은 구원이다. 그래서 카타르시스가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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