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시 루미코의 만화 '란마1/2'이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시기가 아마 1980년대 말부터였을 것이다. 정확한 것은 찾아봐야겠지만 아무튼 중국이 개방되고 서방세계에 알려기시 시작한 초창기다. 그래서 가능했던 만화이기도 하다.
'죽의 장막'이라 불렸다. 냉전시기 극도로 폐쇄적이었던 공산권에 대해 '철의 장막'이라 불렀던 것처럼 중국에 대해서도 역시 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대나무의 이미지에 빗대 '죽의 장막'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당시 중국에 대해서는 서방은 물론 같은 공산권 안에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많은 다양한 상상들이 가능했다. 중국에 가면 이럴 것이다. 중국이라고 하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서는 이런 믿기지 않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같은 중국에 대한 신비에 기댄 작품 중 하나가 무술마니아라면 모를 수 없는 '권아'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팔극권을 배운 일본인 소년이 할아버지를 찾아 중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중국 전통무술들을 경험하는 이야기는 당시 아직 공산화 이후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던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을 것이니. 지금에서야 그 가운데 대부분이 그냥 구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말했듯 중국에 대해서는 당시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란마1/2'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주천향부터가 중국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황당한 설정이었다. 실제 이후로도 뭐만 하면 중국 3천 년 역사 운운하며 새로운 황당한 설정들이 추가되고 있기도 했다. 아니 중국 3천 년, 혹은 4천 년의 신비라는 대사는 당시 중국인이 등장하면 거의 단골로 등장하던 클리셰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어이없고 황당한 것도 중국이니까 가능하겠다. 그러니까 사람이 빠지면 변신하는 주천향도, 주천향과 얽혀서 등장하는 중국의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전통 또한 중국이니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넷플릭스에서 '란마1/2'을 리메이크했다 한다. 요즘 그쪽으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리메이크 소식보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상을 먼저 접했다. 확실히 30년 넘는 세월의 차이 만큼 애니메이션의 때깔부터 너무 차이나더라. TV 애니메이션이었던 만큼 돈 적게 쓴 티가 팍팍 났던 원작에 비해 작화의 차이가 한 눈에도 너무 두드러져 보였다. 그런데 어색하다. 뭔가 내용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2020년대에 인민복 입은 안내인과 중국 오지의 주천향이라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중국 내부의 신비한 오지라니. 지금 그런 게 가능하긴 할까. 아니 그런 게 있으면 일본인들이 몰랐을까?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캐릭터에 인민복이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 시대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무술수련한다고 중국까지 건너가서 주천향에 빠지는 이야기라는 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진짜 추억으로 보는 애니라는 것이다. 지금 세대들에게 과연 그런 장면들이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 설마 아직까지도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런 수준인 사람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 작화도 좋고, 내용이 내용인지라 재미도 있기는 한데, 아니 그 재미라는 것도 고전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끊임없이 인용되고 재활용되며 소모된 터라 새로울 것이 없는 단물빠진 재미이기까지 한 터라 그런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더욱 두드러지게 들어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보게 될 것을 아는 것은 내가 그 세대라는 것이겠지. 늙었다는 이야기다. 늙은 오타쿠들을 위한 작품들이 요즘 꽤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섬광의 하사웨이'도 그렇고.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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