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술을 증류하고 바로 마시려 하면 알콜의 맛과 향이 치고 들어오는데다 원재료의 맛과 향들도 제멋대로 뒤엉켜서 영 먹지 못할 상태일 때가 많다. 특히 곡식으로 술을 증류할 때 더 그렇다. 이 경우는 구리증류기를 쓰지 않으면 황화합물의 냄새까지 더해져서 진짜 술이 역해진다. 그런 것을 또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술의 거친 맛과 향을 보다 깔끔하기 정리해주기 위해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오래 묵은 술이 맛이 있다는 게 그런 이유다. 발효주만을 만들어 마실 때부터 술을 오래 묵혀 숙성하면 맛과 향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숙성하는 기간 만큼 가격은 비싸지게 된다.
위스키가 비싼 이유다. 또한 미국에서 생산되는 버번이 스코틀랜드에서 나오는 스카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싼 이유이기도 하다. 위도가 높은 만큼 기온 또한 낮아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술을 오래 숙성시켜도 증발하는 양이 적은 만큼 필요한 만큼 숙성하는데 들어가는 기간도 길다.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고 건조한 지역이 많아 짧은 기간만 숙성해도 필요한 정도의 완성도 높은 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최소 몇 년 이상 숙성해서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기껏 술을 만들어서 그 기간 동안 팔지 못한다면 그 비용 또한 당연하게 술값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숙성에 필요한 기간을 단축시켜보면 어떻겠는가.
처음 럼이 값싼 술의 대명사로 특히 선원들 사이에서 아예 필수품처럼 여겨졌던 이유였었다. 일단 럼의 주재료가 되는 사탕수수 자체가 평균기온이 매우 높은 서인도제도의 아열대기후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 워낙 날이 더운 만큼 증발량이 많은 것과 비례해서 술의 숙성 또한 무척 빠르다는 장점도 장점이지만, 무엇보다 사탕수수를 가지고 술을 만들어 증류를 하면 특유의 달콤한 향이 술의 거친 맛과 향을 상당부분 가려준다. 당밀 사다가 럼 만들어 보니 바로 알겠더라. 취향이야 타겠는데 당밀로 럼을 만들면 그 자체로 술에서 단 향이 강하게 나서 그냥 마셔도 크게 거부감이 없다. 데낄라도 비슷하다. 역시나 오래 숙성하지 않아도 바로 마실 수 있는 맛과 향이 술 자체에서 바로 난다. 위스키는 일부러 오크통에 담아 숙성해서 내야 하는 그런 맛과 향이다. 하지만 이 역시 멀리 서인도제도에서 실어와야 하니 유럽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리 값싼 술은 아니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시기 그나마 가장 사정이 낫다는 영국에서조차 임금노동자들의 수입은 진짜 처참한 수준이었다. 아일랜드인들의 피와 살을 짜내서 밀과 소고기 만큼은 어느 정도 값싸게 공급할 수 있었지만 술은 진짜 언감생심이었다. 기껏해야 물 대신 마시는 맥주가 아니면 제대로 숙성을 거치지 않은 거친 증류주 정도가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술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위스키가 그때부터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리 값싼 술이 아니었기에 마음껏 마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진이 유행한 것이었다. 오랜 숙성을 거치지 않고도 크게 부담없이 거슬리지 않고 마실 수 있는 술이었기 때문에.
진짜 우연이었다. 발효주를 만들어 증류했는데 이게 바로 먹기에는 이래저래 맛이나 향이 너무 거칠고 역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궁리한다. 첫째 방법은 보드카처럼 증류를 반복해서 가장 순수한 상태의 주정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럴 거면 그냥 보드카 마신다. 아니 굳이 발효주 만들어 증류까지 하느니 마트에서 담금주 사다가 주정을 만들면 그게 더 싸고 빠르고 편하다. 그래서 궁리하다가 생각한 것이 유튜버들이 술을 마시고 평가하면서 흔히 내뱉던 몇 가지 단어들이었다. 시트러스한, 혹은 스파이시한, 달콤한, 증류주에 감미료를 넣거나 하지 않았을 테니 대부분은 향기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숙성과정에서 생겨나는 것들이겠지만 그것을 증류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넣을 수 있다면 비슷한 술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비슷한 향이 나도록 계피와 생강, 진피, 후추와 같은 향신료들을 발효주 원주에 넣어 같이 증류해 보았다. 증류가 시작되는 순간 알았다. 이거 진짜 맛있겠다. 진짜 바로 증류해서 마시는데도 향신료의 강한 향이 알콜의 거친 맛과 향을 눌러주면서, 더불어 곡주 특유의 맛과 향 역시 한 번에 정돈해주는 터라 이게 꽤 괜찮아진다. 심지어 오크칩까지 넣어 한 2주 정도 놓아두니 내가 기대한 바로 그런 증류주가 나왔다. 이거 내 오리지날이구나.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또한 진으로 분류되는 증류주의 특징이었다. 노간주나무 열매와 고수씨앗을 중시으로 여러 향신료들을 넣어 오랜 숙성을 거치지 않고서도 증류주 자체에 고유한 맛과 향을 입힌다. 그런데 바로 이 증류과정에 들어가는 향신료들이 그리 비싼 것들이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니란 것이다. 굳이 많은 양을 넣을 필요도 없다. 그냥 술에 향만 입히면 그만일 테니.
그냥 아무 재료로나 대충 원주를 만들면 그것을 증류하는 과정에서 여러 다양한 향신료를 통해 원하는 맛과 향을 낼 수 있게 된다. 굳이 비싼 재료를 쓰고 싶지 않으면 그에 걸맞는 값싼 재료를 넣어도 상관없다. 참고로 저거 만든다고 사놓은 향신료들 지금 5분의 1도 다 쓰지 못하고 아직 한가득 남아있는 상태다. 그리 많이 산 것도 아닌데 실제 증류할 때는 생각한 것보다 그리 많이 안 들어간다. 그러니 값도 쌀 밖에. 진이 발명되면서 런던에 알콜중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원재료도 사실상 가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값도 싸면서 마시는 것도 거슬리지 않는, 그런데다 한 방에 바로 취해 버릴 수 있는 최고의 술이었을 테니. 더욱 사는 것이 고단한 노동자들이나 혹은 도시의 빈민이나 매춘부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는 것이 힘들수록 그런 현실을 잊게 만드는 마약과도 같은 술은 필수재이다시피했을 테니. 맥주보다 쉽게 빨리 취할 수 있으면서 맛까지 좋다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특히 런던에서 범죄의 발생빈도와 정도와 강도가 진의 발명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실제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홈즈라는 추리소설의 걸작이 만들어진 것이고.
아무튼 술을 직접 만들어 보니 알겠다. 나 역시 같은 길을 따라갔던 것이었다. 그래서 또 떠오르는 술이 바로 진도의 홍주다. 역시나 술을 증류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약초를 통해 특유의 붉은 색과 고유한 맛과 향을 입히는 경우다. 역시나 긴 숙성을 거치지 않고서도 만들기도 어렵고 재료도 많이 들어가는 증류주를 보다 즐겁게 마시기 위한 나름의 고심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감홍로나 죽력고, 혹은 이강주 같은 술들도 나오게 된 것일 테고. 여름을 넘기는 술이라는 과하주 또한 더운 여름에 술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목적 이외에 증류주의 거친 맛을 발효주의 단맛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 남아 있는 전통주의 레시피나 구한말 이후의 기록을 보더라도 반드시 과하주를 여름에만 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궁리해서 만든 술도 그러한 역사의 한 구석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히 새로운 일은 없다.
그러니까 어째서 럼이고 진이었는가. 영국 해군이 군함에 승선한 승무원들에게 럼을 지급하지 않게 된 것이 무려 1970년대였다. 그 동안 영국 해군을 비롯한 뱃사람들에게 럼은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진은 역시나 지금도 세계 4대 증류주의 하나로 그 영역을 끝도 없이 넓혀 가는 중이다. 한 마디로 그냥 향신료 넣어서 증류한 술은 죄다 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통일성이라고는 없는 그 태생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술일 것이다. 그래서 또 원래 하지 않던 숙성까지 더해서 값비싼 놈들도 심심찮게 보이게 된다. 그런 술의 역사를 언뜻 엿본 듯한 느낌이랄까? 새삼스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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