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환상...

까칠부 2010. 6. 21. 17:28

사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싱어송라이터란 매우 드물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제법 있었지만 주류무대에서는 거의 없었다 보면 되었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작곡가는 곡을 쓴다.

 

어느 정도 업계 종사자에 대한 배려 차원도 있었다. 어차피 당시 작곡가들의 작곡료란 그리 많지 않았다. 열심히 곡을 써 주고 해도 정작 작곡가에게 돌아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저작권료로 돈을 벌 수 있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도 일단은 곡을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싱글이 없던 것도 그래서였다. 싱글 한 곡 낼 것 굳이 열 곡 넘게 채워 앨범을 내자면 그만큼 작곡가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었다. 하물며 기왕에 있는 가수가 작곡가를 거치지 않고 자작곡을 낸다는 건...

 

그래서 이선희도 처음 자작곡을 들고 나왔을 때 그리 무시당하고 했었다. 가수는 노래나 부르는 거다. 곡은 작곡가가 쓰는 거다. 그것이 바뀐 것이 바로 80년대.

 

그야말로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요계 안에서의 내적 성장도 있었고, 들국화를 비롯 밴드가 전면에 나서면서 팝에 쏠려 있던 대중의 관심이 가요계로 돌아온 이유도 있었다. 윤수일, 조용필, 전영록 등의 대중적인 스타가수들이 나타났고, 들국화, 송골매, 부활, 시나위 등의 밴드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궁옥분 같은 다운타운의 포크문화를 잇는 이들도 있었다. 아예 데뷔를 자작곡으로 데뷔하는 가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는 그것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자기가 곡을 쓰고 부를 수 있어야 진정한 아티스트다."

 

그때까지 희귀하던 싱어송라이터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곡을 쓰고 프로듀스도 할 수 있어야 아티스트다. 곡도 못 쓰고 프로듀스도 못하면 아티스트가 아니다.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전의 이미자, 남진, 현미, 김추자, 사실 자작곡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키보이스같은 밴드들도 굳이 자작곡 아닌 기성작곡가의 곡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구닥다리로 여겨지게 된 것이었다. 음악을 한다면 곡을 쓰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이가 없는 것이 이승철더러 자작곡 없다고 폄하하는 어떤 시각들. 임재범도 사실 직접 곡을 쓰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음악이 가치가 없는가.

 

왜 대중가요에서 어떤 노래에 대해 작곡가가 아닌 가수의 이름이 그 앞에 붙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이승철이 다르고 임재범이 다르고 이문세가 다르고 김현식이 다르다. "이등병의 편지"는 원래 전인권이 부른 노래였는데 김광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이문세의 노래는 이문세이기에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 이문세이기에 맛이 나는 부분도 있다. 이선희의 히트곡 가운데서도 듣고 있으면 곡이 참 난해한 경우가 적지 않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다. 어떻게 이런 곡이 히트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선희가 부르니 맛이 난다.

 

대중음악의 완성은 보컬이다. 연주곡이 아닌 이상 보컬을 통해 대중에 들린다. 그 보컬이 그 노래를 어떻게 소화하는가. 어떻게 소화해 들려주는가.

 

보컬만이 아니다. 퍼포머도 있다. 어떤 음악을 어떤 무대를 통해 보여주고 들려주는가. 거기에는 각자 보컬과 퍼포머의 개성과 역량이 크게 작용한다. 어떤 보컬도 퍼포머도 결코 같을 수 없다. 서로 다르고 차이가 나며 거기에서 노래든 무대든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과연 가치가 없는가.

 

아무리 곡이 훌륭해도 보컬이 살리지 못하면 망한다. 아무리 곡이 좋아도 퍼포머가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그 무대는 망한 것이다. 어떻게 그 노래를 살릴 것인가.

 

물론 프로듀서의 역량도 중요하다. 프로듀서란 작곡가의 의지와 보컬의 역량과 대중의 욕망을 이어주는 존재다. 그렇더라도 역시 대중과 만나는 것은 보컬이고 퍼포머다.

 

가끔 80년대란 한국 대중음악에 있어 축복이면서 어쩌면 족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80년대는 정말이지 한국 대중음악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던 시기였다. 한국 대중음악은 80년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팝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80년대의 성과에 사람들의 생각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시는 싱어송라이터가 무척 대단한 것이었다. 없던 것이니까. 잘 없던 것이니까. 그러나 싱어송라이터만이 대단한가면 그동안 자기 무대를 만들고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려 매번 최선을 다하던 가수들은 뭐란 말인가. 그들도 아티스트다. 노래를 부른다는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예술행위다. 곡을 써서가 아니라.

 

보컬도 아티스트인 거다. 퍼포머도 아티스트인 것이다. 작곡가는 노래를 부르고, 프로듀서는 그것을 구체화하고, 보컬과 퍼포머는 그것을 다시 대중에 전달한다. 누가 더 낫다 못하다  할 수 없는 자기 영역인 것이다.

 

왜 굳이 퍼포머가 곡을 쓰고 프로듀스를 해야 할까. 아이돌이 굳이 작곡가 놀음을 하고 프로듀서 연기를 해야 할까. 자기가 아티스트임을 보여주기 위해 곡을 쓰고 가사를 쓰고 프로듀스도 하고. 그러나 정작 그의 가치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원래는 이승철에 대한 비난을 겨냥해 쓰려 했었다. 이승철은 비록 자작곡은 그리 없어도 어떤 곡이는 최고의 음악으로 들려주는 정말이지 보물과 같은 보컬이다. 물론 나는 임재범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 역시 굳이 자작곡이 필요 없는,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보컬이다.

 

이효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효리에게는 이효리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곡을 쓰지 못하고 음반을 내지 못한다고 그것이 가치가 없는가.

 

물론 소수다. 어차피 대중은 그런 것 신경쓰지 않는다. 좋으니까 듣고 좋으니까 즐긴다. 이효리가 곡을 쓰든 못쓰든, 이효리가 프로듀스를 했든 어쨌든 좋아서 듣는다. 다만 말만 많은 몇몇이. 덕분에 아티스트에 대한 동경으로 괜한 짓을 하다 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울 뿐.

 

이번 표절사태는 프로듀서로어의 이효리의 미숙함이 빚어낸 결과다. 무대에서의 표현력은 분명 탁월하지만 과연 그런 부분에서까지 이효리에게 충분한 역량이 있는가. 글쎄... 솔직히 이효리가 프로듀서를 했다는 자체도 난 잘 믿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효리라는 가능성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재능을 모두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 누군가는 곡을 잘 쓰고 누군가는 노래를 잘한다. 누군가는 연주를 잘 하고 누군가는 춤을 잘 춘다.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해도 무대에서 연기를 잘 할 수도 있다. 외모가 강점이기도 하고 다른 장점이 있을수도 있고. 그렇다면 자신의 강점으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건 아집이다. 보컬도 아트고, 퍼포먼스도 아트고, 연주도 아트고, 곡을 쓰는 것도 아트고, 음반을 만드는 것도 아트다. 무엇 하나 어느 것이 더 뛰어난 것이 있는가.

 

퍼포머도 퍼포먼스 아티스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력 없이 무슨 가수인가? 그 무대가 바로 그들의 창작능력이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아티스트 아닌 아티스트들이 때로 너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