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나선다.
"당신이 범인이지?"
어쩐지 수상하다. 의심이 간다.
"봐, 이것도 증언이 틀렸어. 빚도 졌네? 신용불량자야? 어? 10년 전에 폭행전과도... 당신이 범인 맞아!"
그때 탐정이 나선다. 김전일이어도 좋고 토마여도 좋고 코난이어도 좋다. 또 누가 있지?
"여기 이런 증거가 있네요. 이런 증언도 나왔어요. 다른 사람이 범인이에요."
물론 대부분의 추리물은 여기서 끝난다.
"으흠... 흠... 내가 잘못 생각했구만."
그러나 어느 추리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니 저 사람이 어제는 이런 거짓말을 했더라니까. 그저께는 저런 사고를 쳤고, 여기서도 증언이 확실하지 않은 게 있고, 증거란 조작될 수도 있고, 증언도 저 사람이 잘못 알아서..."
"그러니까 여기 증거가..."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이런 정황이 있으니까 저 사람이 범인이야!"
참 난감하겠지?
우리나라에서 추리물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다. 원래 추리물이란 구체적인 증거와 증언으로 하는 것이다. 막연한 정황과 추측이 아니라 확실하게 드러난 증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추적하여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증거가 이런 거 이런 거가 있으니 취합하면 저 사람이 범인 맞네."
혹은,
"이런 증언과 저런 증언이 나왔는데 결국 종합하면 이런 내용이 되는구만. 저 사람은 아냐."
그러나 우리나라 수사란 어떠냐면 딱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식이다.
"너 범인이지? 불어! 증거? 그런 걸 어떻게 믿어! 불어! 안 불어? 불어! 불어! 불어!"
그래서 고문이라는 게 나온다. 그렇게 무고하게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가 또 몇이나 될까? 모른다? 아무도 그런 걸 밝힌 사람이 없으니까.
정황이라는 건 증거가 나오기 전에나 의미가 있다. 증거가 나오기 전 그 증거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정황이고 추리다. 이러이러한 형태의 사건일 것이면 이쪽에서 이런 증거가, 저쪽에서는 저런 증언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증거와 증언이 나오고 나면 정황이란 의미가 없다. 증거와 증언이 더 우선한 가치를 지니므로.
그래서 초동수사가 중요하다는 거다. 증거를 확보해야 하니까. 먼저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고 그를 토대로 수사를 진행햐 나가야 하는 거다. 그런데 그냥 감으로 찍고 우격다짐으로 잡아넣으니 초동수사가 필요할 리 있나. 그래서 항상 나오는 말,
"초동수사의 부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에서 추리물 나오면 난감할 거다. 탐정이 나와서,
"이런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하는 말,
"그런 것 필요 없어. 정황이 그래! 정황이! 이놈이 범인이 맞아!"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아는 사람은 알리라. 참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재판을 하더라도 상대가 어떤 증거를 가지고 나오면 그것이 어떤 이유로 증거력이 없는가를 이야기해야지, 증거가 엄연히 있는데 단지 정황만으로 그럴 것이다...
"추측성 발언은 삼가해 주십시오."
역시 재판물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하여튼 추리물의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꼭 탐정을 돋보이기 위해 등장하는 3류 액스트라 형사마냥.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끝날까 짜증만 날 뿐이다.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과 싸울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확실하면 경찰에 신고하라는 것이다. 실정법위반이다. 확실히 보내버릴 수 있다.
현실은 탐정물이 아니다. 서로 좀 편하게 살자. 성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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