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란 한 마디로 투쟁본능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것이다. 굳이 격투기만이 아니다. 주어진 룰 안에서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상대를 꺾고 쓰러뜨리는 것이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 지더라도 선전하니 좋다? 정정당당한 패배가 좋다? 그건 쓰러질 정도로 그라운드에서 뛰고 마침내 져서 눈물을 흘리고 마는 선수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역시 선수들과 하나가 되어 미친듯 이 열광하며 응원하던 관중들에게도 별 의미가 없는 말이다.
물론 좋은 경기를 보여줬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더라도 이겼을 때의 기쁨만은 못한 것이다. 100대 0으로 지던 것을 마침내 1대 0으로 지게끔까지 왔다. 그래봐야 어차피 진 것이고 이겼을 때의 환호와 기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모든 선수들은, 팀들은 승리를 위해 싸운다. 모든 선수와 팀과 팬들은 승리를 하고 우승을 거두기 위해 싸운다. 16강이 목표다? 할 수 있으면 8강 가는 거다. 4강 가는 거다. 2002년 우리나라가 우승할 것이라 들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 우승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전력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한 번 반드시 우승도 해보고 싶다. 4강에서 독일에 패한 것이 무에 그리 억울할까마는 그래서 그 패배에 많이들 아쉬워하고 서운해했었다.
그래서다. 어느 팀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고 가장 뛰어난 선수가 누구인지 아는가? 예를 들어 그리스전에서의 차두리다. 과연 차두리의 실력이 대표팀에서 최고였을까? 아니다.
어느날 우연히 경기장을 찾았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팀의 전혀 모르는 선수가 맹활약을 한다.
"쟤 누구야?"
때로 그렇게 한 순간에 팬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후 계속 죽을 쑤고 바닥을 기더라도 그 한 순간, 내가 직접 지켜보는 그 경기에서 최고였다면 그는 최고가 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선수라도 내가 보고 있는데 형편없이 뛴다. 그건 아닌 거다.
물론 고정된 것은 아니다. 오늘의 경기에서 최고였으면 그는 최고다. 그러나 다음 경기에서 최악이면 그는 최악이다.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강할수록 선수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그 기대가 커진 만큼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실망도 커진다. 그래서 한 순간에 감정을 발산해 버린다. 물론 다음에 잘하면 그때는 또 돌변해서 자신의 영웅을 위해 최대의 찬사를 바친다.
당연한 거다. 오늘은 개새끼소새끼하다가 다음에는 전설이네 레전드네 없으면 안 되는 선수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리고는 또 다음에 개새끼소새끼 이번에는 바퀴벌레까지 나오고.
그것도 한 재미라는 거다. 도대체 팔짝 딱 끼고 머리고 계산하면서 경기를 볼 거면 그게 뭔 재미가 있는가? 데이터란 경기가 끝나고 나서 분석할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런 분석도 잘 하지 않는다. 단지 다가오는 순간을 즐긴다. 스포츠가 주는 그 흥분을. 그 짜릿함을. 승리가 주는 그 성취감과 패배로 인한 그 실망과 좌절을. 그렇게 한없이 불타오르고 달아오르고 또 식어버린다.
선수 이름을 일일이 다 외워야 하고, 룰도 다 알아야 하고, 데이터도 외워야 하고, 평소 그가 하던 것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어제 내가 한 말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아, 귀찮아라...
마니아가 이래서 문제다. 마니아는 항상 너무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더러도 너무 깊이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다. 대중적이라는 것은 가볍다는 것이고 얕다는 것이고 즉흥적이고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마니아들을 위한 것은 너무 깊고 무겁고 부담스럽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게시판이 달아오르는 것이 옳다. 정상이다. 누군가를 욕하고 누군가를 찬양하고 그 또한 경기를 즐기는 방법이다. 경기에 몰입하고 경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다. 그런 것까지 뭐라 하기엔...
분명 이번 월드컵에서도 축구라곤 한 번도 보지 않던 사람들이 꽤 많이 휩쓸려 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상이다. 길가다가도 누군가 재미있게 축구경기를 하고 있으면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본다.
"지금 어디하고 어디하고 하는 거죠?"
다만 가끔 그렇게 구경하다가 과격해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인이다. 전혀 상관없는 경기임에도.
원래 인간은 기본적으로 냄비다. 투쟁심이 강할수록 스포츠는 냄비일 수밖에 없다. 스포츠란 투쟁이다. 냄비들이 터지도록 달아올랐다 식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스포츠의 재미다.
남자의 자격 월드컵편이 갖는 의미가 그것이다. 냄비들이다. 이경규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머지 가운데 평소 축구를 즐겨보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축구 룰도 모르던 김태원이나. 그러나 그래도 즐겁다는 거다. 그래도 흥겹다는 거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과도 즉석에서 어울리고.
잘 알아서가 아니다. 평소 즐겨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즐거운 거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그런 경기가 열린다는 것이. 국가대표경기란 그래서 때로 축구와 상관없는 사람들마저 끌어들인다. 축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열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장사도 뒤로 하여 축구에 몰두하는 점원이나, 다리를 다쳤는데도 축구를 보러 나오는 환자들, 물론 4년짜리 적금을 들어 4년에 한 번 월드컵 은원에 참가한다는 열성팬들도. 물론 축구가 좋아서이겠지만 단지 그런 이유 뿐이겠는가. 바로 그런 것이 축제란 것이다.
가끔 너무 진지해지고 너무 엄숙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이유다. 그런 건 스포츠가 아닐 텐데. 그렇게 즐기자는 것이 아닐 텐데. 너무 진지해지면 서로가 피곤해진다. 항상. 재미도 없다.
다만 아쉽다면 경기장면을 사용할 때 그것이 정당하게 쓰이고 있었는가. 남자의 자격이 항상 당당하기를 바라기에 그런 점이 많이 걸린다. 너무 나가지 않았으면. 솔직한 바람이다. 위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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