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료마전 - NHK대하역사심리드라마...

까칠부 2010. 6. 28. 21:12

독특하다. 아주 독특하다. 그런데 이게 딱 일본스럽다. 일본드라마스럽다.

 

료마전의 배경은 막말유신기다. 개항이냐 양이냐, 도막이냐 좌막이냐로 많은 지사들이 서로 죽고 죽이던 격동의 시기다. 당연히 거대담론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다. 거대담론이 나와야 한다.

 

<신센구미>도 그랬다. <신센구미>에서도 주는 개항과 양이, 좌막과 도막이라는 거대담론이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였다.

 

<료마전>도 그렇지 않을까. 그동안 사카모토 료마를 다루는 것이 그랬다. 그가 살았던 시대란 그렇게 거칠고 사납던 시대였으므로. 사카모토 료마가 의미하는 것도 그랬다.

 

그런데 이게 전혀 다르다. 도대체 료마가 주인공인가. 다케치 한페이타가 주인공인가. 아니다. 이조, 요시다 토요, 특히 이와사키 야타로가 그렇다.

 

료마전의 등장인물을 보면 대충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료마와 함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들과 다케치 한페이타와 마찬가지로 욕망에 휘둘리는 이들.

 

이와사키 야타로가 화자로 나선 이유도 그것이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욕망 그 자체다. 출세욕, 물욕, 명예욕, 거기에 체화된 열등감과 비뚤어진 우월감, 그리고 우월한 자에 대한 비굴함과 질시가 한 몸에 있다. 그가 료마를 싫어하는 것도 그래서. 료마에게는 욕마이 없다.

 

이와사키 야타로의 반대편에는 다케치 한페이타가 있다. 그러나 다케치 한페이타란 이와사키 야타로의 이란성 쌍동이다. 다만 차이라면 그는 이와사키 야타로와는 달리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다. 억눌린 욕망은 가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와 갈등한다.

 

다케치 한페이타에게 료마란 지키고 싶은 순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그의 본심은 그의 내면에 있다. 그것은 자신마저 대상화시키는 지독한 에고다. 주위에 떠받들려지면서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는 그것을 억누른다. 그러나 또한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키운다. 그는 모두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자신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 괴리가 그로 하여금 료마를 찾도록 한다. 그리고 료마에 거리를 둔다.

 

요시다 토요가 다케치 한페이타를 싫어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솔직하지 못하다. 당당하지도 못하다. 그가 하는 말이란 그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림자의 말이다. 과연 다케치 한페이타는 양이를 꿈꾸는가. 진정 그는 양이를 목표로 하고 있는가. 단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허위의 갑옷을 그는 꿰뚫어본다.

 

그것은 요시다 토요 또한 에고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지독스런 이기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그것은 자신감이다. 다케치 한페이타란 그것을 흉내내려는 가짜에 불과하다. 싫은 것을 넘어 그는 다케치 한페이타를 증오하고 있다.

 

둘의 충돌은 이미 예고된 바였다. 그리고 보다 명쾌한 요시다 토요의 에고는 뒤틀리고 음험한 다케치 한페이타에 잡아먹힌다. 그는 그 순간 자신도 인정하듯 괴물이 되어 버린다. 체회된 열등감은 억눌린 욕망과 만나며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이미 더 이상 이전의 다케치 한페이타가 아니었다. 그는 지나치게 솔직해져 있었다. 그가 료마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은 그가 더 이상 료마를 돌아보려 하지 않기 때문.

 

흥미롭다. 과거 다케치 한페이타란 열등감과 뒤틀린 에고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이래서야 다케치 한페이타가 주장하는 양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다. 하나는 거대담론에 치이는 개인들. 료마와의 관계를 강제로 단절해야 햇던 카오와 다케치 한페이타에 의해 살인도구로 이용당하는 이조가 그렇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그 거대담론이란 결국 뒤틀리고 억눌린 에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실 사츠마나 쵸슈나 그들이 주장한 양이나 개국에는 나름의 이기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기가 시대와 만나며 거대담론을 이룬 것이었다. 그 앞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고.

 

결국은 둘은 하나라 할 수 있다. 왜곡된 개인과 그 개인에 의해 왜곡된 시대와 그에 희생되는 개인. 그리고 아마 그것은 현재의 혼란스런 일본을 이야기하고 있겠지. 그동안 그토록 개혁을 외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몇몇 개인의 에고로만 돌아가는 현실에.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개인의 희생만이 강요당하는 현실에. 료마란 그런 시대를 지켜보는 관찰자며 그런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그 자체다.

 

이조도 그를 만나면 좋아한다. 요시다 토요도 그를 좋아한다. 다케치 한페이타도 그를 원한다. 이와사키 야타로 또한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료마가 그들을 이끄는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케치 한페이타나 이와사키 야타로나 그와 거리를 두고 질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결국 이란성 쌍동이인 때문이다. 그들은 닮았으며 그래서 서로 어울릴 수 없다.

 

카오의 오빠 히라이 슈지로가 그를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케치 한페이타의 한 부분이다. 그 또한 억눌렸으며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솔직하다. 그것을 다케치 한페이타에게 맡기고 있다. 그는 시대를 보려 하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다케치 한페이타와 자신만을 본다. 그에게 료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가장 솔직하며 가장 탐욕스럽다.

 

재미있었다. 특히 이조가 살인자로 거듭나는 과정이. 이조 역을 맡은 배우가 또 하필 내가 일드를 보지 않는 사이 데뷔한 모양이다. 순진무구한 개구장이같은 얼굴로 살인자로 거듭나는 과정이 정말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처음이라 허둥대고 실수하면서도 집요하게 쫓아가 상대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이조의 변화를 제대로 보여준다. 조금 더 연출이 세련되었으면 멋졌으련만 이런 것도 또 일본드라마의 한계다. 미학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또 굉장히 평면적이다.

 

그러나 이후 살인자로서 길들여져가는 모습이나 료마를 만나 다시 순수하던 시절로 돌아오는 모습은 매우 세심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여전히 다케치 한페이라를 쫓으며 병아리가 어미닭을 쫓아가듯 의지하는 모습 역시. 순수함과 잔인함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라. 그런 디테일이 또한 일본드라마의 강점이다.

 

내가 말하는 생각없음이다. 자기 생각 없이 무조건적으로 다케치 한페이라의 정의를 쫓는 그의 선량함과 순수함은 그의 칼에 묻는 피로 나타난다. 슬프지만 그러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데 비극이 있다.

 

더 지켜봐야 한다. 아직 15화까지밖에 못 보았다. 이후로는 어떻게 진행될까. 일단 인코딩부터 하고. 이동하면서 옴니아로 보고 있는 중이라. 멀었다. 기대된다.

 

 

덧, 료마치고는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많이 늙었다. 69년생인가? 료마가 죽을 때가 31살이다. 10살이 많다. 젊은 시절의 료마를 보여주는데 얼굴에 늘어진 나잇살이 조금 거슬린다. 다만 료마전의 료마는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약간의 그늘이 느껴지는 분방함이.

 

히로스에 료코의 카오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히로스에 료코가 언제적 히로스에 료코인가. 10대 시절부터 보여주는데 내내 어색해 혼났다. 몰입이 안 된다. 이제는 출연이 없을 듯 하니 다행. 왜 하필 히로스에 료코였을까. 그닥 마음이 들지 않는 캐스팅이다.

 

카가와 테루유키는 기대한대로. 내가 좋아하는 배우 가운데 하나다. 이와사키 야타로의 서툴게 솔직한 욕망을 아주 잘 묘사해 보여주고 있다. 타니하라 쇼스케는 역시나 애매한 조역으로 나오고 있지만 카츠라 고고로이니 기대할만 하겠고. 그리고... 확실히 NHK대하드라마가 캐스팅은 화려하다.

 

그리고 역시 사극에서 스케일은 우리이고 디테일은 일본이다. 내가 일본 사극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바로 그 디테일 때문. 고증이야 어떻든 그 디테일에서의 개연성이 나는 좋기 때문이다.

 

단, 여기에서 쓴 내용은 실제 역사상의 인물이 아닌 드라마상에 묘사된 인물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오해는 없도록. 역사적인 평가는 다른 데서 할 거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