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에 TV 앞에 앉아 있었다. 두근두근두근... 당시 우리집 TV는 어디선가 얻어온 미닫이 문이 있는 흑백TV였다. 치직거리는 잿빛 화면에 빡빡머리의 김일선수와 당시 콧수염을 기르고 있던 이왕표 선수가 나타나면 얼마나 설레었던지.
사실 더 많은 선수가 있었다. 더 많이 환호하던 선수들이 있었다. 하나하나 이름까지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오래전이라... 그나마 지금도 미디어에 얼굴을 내비치는 것은 이왕표 선수 정도고 나머지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깡그리 잊혀지고 말았다. 누가 있었더라... 시간은 이렇게 잔인하다.
아무튼 김일선수가 나타나면 항상 상대편에는 외국인 선수가 있었다. 그것도 기괴한 복장에 딱 보기에도 '나 나쁜놈이오!' 하는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들을 야유했다.
"우우우우우~~!!"
"나쁜 놈 꺼져라~!"
"김일 선수, 저 나쁜놈을 혼내주세요!"
프로레슬링이란 그렇게 선과 악이 만나는 전장이었다. 정의의 영웅과 사악한 악당이 있었다. 영웅은 우리 편이었으며 악당은 적이었다. 모두는 선이 이기기를 바랐으며 정의가 이기기를 믿었다. 영웅이 마침내 악당을 물리쳐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거기에는 원초적인 민족주의가 들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항상 보면 파이널에 김일 선수가 상대하던 악의 선수들은 하나같이 외국인들이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일본인 선수들이 적잖이 악역을 맡아 김일 선수와 싸우고 있었다. 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한국인의 유전자 레벨에 새겨져 있다.
아무튼 선과 악은 링 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의의 편인 영웅들은 결코 반칙을 써서는 안 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정의의 영웅들은 결코 반칙을 쓰지 않았다. 흉기를 쓰는 것도, 태그매치에서 태그를 하지 않고 비겁하게 둘 이상이 한 선수를 공격하는 것도, 접이식 의자를 휘두르는 것도 모두 악당의 몫이었다. 불리해지면 링 아래로 도망쳐 시간을 끄는 비겁함도 오로지 악당의 몫이었다.
얼마나 안달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얼마나 악당을 저주하며 원망했는지 모른다. 심판까지도 그렇게 미웠다. 왜 흉기를 숨긴 것도 모르고 있을까. 왜 태그도 않고 상대편 선수가 여럿이 함께 공격하는데도 그것도 말리지 못하는가. 무력하게 당하는 선수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끔 태그를 이룬 다른 선수가 협공을 당하는 같은 팀 선수를 구하기 위해 나와 뒤에서 공격할 때는 그것이 반칙이라는 생각도 없이 환호를 질렀다.
그러고 보면 태그매치의 마지막은 양팀의 선수들이 한꺼번에 나와 난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거의 마지막 김일 선수가 한 선수를 몰아세우면 다른 선수가 나와 그것을 공격하려 들고, 그러면 태그를 이룬 이왕표나 다른 선수가 나와 그것을 제압하며 링을 지배하고 있었다. 때로 상대 선수들이 모두 링 아래로 쫓겨나 올라오지 못하기도 하고, 두 상대선수 모두 코브라트위스트를 당하며 제압당하기도 했다. 폴을 당하거나 할 때는 더 극적인데, 폴을 하는 선수의 뒤를 상대팀 악역이 공격하면 이쪽에서 나와 그를 몰아내며 마지막 승리를 거두기도 했었다.
영웅은 고난이 있다. 영웅에게는 위기가 있다. 악당은 사악하며 비열하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은 그럼에도 정직하게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오롯이 법을 지키고 규칙을 지킨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는 것은 영웅이다.
아마 그것이 열광했던 것 같다. 솔직히 어려서 뭐 아는 게 있을까. 하지만 어른들은 달랐을 것이다. 힘들던 시대였다. 모든 것이 힘겹기만 하던 시대였다.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정의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열등감도 있었다. 가난이라는. 무지라는. 무력이라는. 그런데 링 위에서 레슬러들은 그런 정의를 보여주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크게 드러나는 것은 없어도 - 정의의 레슬러는 항상 복장이 수수했다. - 그리고 반칙을 쓰지 않아도, 오로지 정도를 걷고서도 마침내 온갖 수단을 쓰는 악당을 물리쳐 이긴다. 그것은 꿈이었다. 모두가 바라던 꿈이었다.
프로레슬링이 몰락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믿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눈앞에 보이는 꿈이 사실은 꿈이 아닌 사실이라고. 그러나 리얼버라이어티를 표방하던 패떴의 대본이 유출되었듯 프로레슬링에서도 대본이 있고 연출이 있음이 대중에 알려졌다.
"그렇게 하면 피가 많이 나오지 않잖아?"
아버지가 그리 프로레슬링을 싫어한 이유를 나중에 들었다. 아버지도 어지간히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셨던 모양이라.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락커룸 근처를 서성이다 들으셨단다. 어떻게 하면 피를 더 흘릴까 상의하던 모습을. 그 이후로 프로레슬링은 쇼라며 그렇게 싫어하셨는데.
권투가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상당부분 가져간 것도 그래서였다. 프로복싱에는 대본이란 없으니까. 민속씨름이 나타났다. 이만기가 연출따위 없이도 거구의 선수들을 연거푸 쓰러뜨리며 천하장사가 되고 있었다. 이만기 선수는 원래 당시까지도 한라급이었다. 백두급 아래였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은 선수가 오로지 기술 하나로 전국의 난다긴다하는 백두급의 장사들을 쓰러뜨리고 천하장사의 지위에 오르고 있었다.
이봉걸은 힘이었다. 그는 경이였다. 그러나 이만기는 그런 이봉걸조차도 기술로 누르고 있었다. 강호동이 아무리 대단했어도 이만기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선수로서는 강호동이 더 나을지 몰라도 스포츠가 주는 꿈이라는 부분에서 이만기는 이미 전설이었다. 그는 김일을 대체하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프로레슬링의 링에는 정의란 없었다. 기기묘묘한 아크로바틱 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이어도 상관없기는 했겠지만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이미 많이 나오고 있었다. 한때 프로복싱 세계챔피언만 7명인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돌리고 있으면 세계타이틀매치였다. 그리고 민속씨름이 있었다. 과연 이만기가 나타나고 학교 모래밭에서 씨름 한 번 해보지 않은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프로레슬링은 그렇게 몰락했다. 프로레슬링이 내세우던 링 위의 정의가 사라지면서 프로레슬링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순진했었다. 그리고 너무 간절했었다. 정의가 있기를. 선과 도덕이 승리하기를. 사람들은 너무 순진했고 그래서 용서가 없었다. 아마 지금이었다면... 그러나 이미 이종격투기가 그나마의 격투기 시장을 차지해 버렸다. 프로레슬링도 더 화려한 쇼인 미국의 WWE가 있었다. 쇼로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이 몰락했다고 프로레슬링이 주는 꿈이란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도 항상 틈만 나면 프로레슬링 놀이를 했었다. 무한도전에 나온 동작은 다 해 보았을 것이다. 코브라 트위스트도 해 보았다. 그것 꽤 아프다. 김일 선수가 경기를 마무리하는 기술도 대개 코브라트위스트였다. 박치기로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대를 코브라트위스트로 엮어 선 자세로 항복을 받아 끝.
그렇게 연구를 했었다. 이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동작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서로의 안전을 위한 배려나 조치란 빠져 있었다. 적당히 충격을 줄이고 동작이 크게 보이도록 요령이 있어야 하는게 그걸 몰랐다. 말 그대로 살법이었다. 어디 부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로 인해 수명이 몇 년 씩은 다들 감소했으리라. 그러나 역시 너무 오래전 일이라...
어쩌면 그때의 꿈을 대신하는 것이 리얼버라이어티일 것이다. 리얼버라이어티가 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리얼버라이어티는 악해서는 안된다. 독해서도 안 된다. 물론 그런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선을 지켜주어야 한다. 넘치지 않도록. 꿈이 이어지도록. 뜨거운 형제들이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리얼버라이어티란 꿈이어야 한다. 리얼리티라는 단어가 주는 현실을 대체하는 꿈.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의 투사다.
단순히 인기연예인이 나와서가 아니다. 인기 연예인이 나와서 망가지고 웃기고... 그러면 그 안에 어떤 꿈이 있는가? 현실의 억눌린 자아와 욕구와 추구와... 어떤 일상과 비일상이 그 안에 있으며 어떤 꿈을 꾸게 하는가. 반드시 리얼일 필요는 없다. 리얼리티로 충분하다. 프로레슬링의 작위성에 실망한 대중도 WWE의 노골적인 작위성에는 열광하고 있었다. 어설픈 리얼보다 솔직한 작위가 오히려 더 리얼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대중은 어떤 꿈을 꿀 수 있는가.
코미디는 그래서 프로레슬링과 어울린다. 쇼란 그래서 프로레슬링과 어울린다. 예능이란 또 그래서... 남자의 자격에서도 한 번 쯤 시도해보았으면 좋았을 소재였는데. 오히려 더 가깝지 않을까. 이경규나 김태원이나 김국진이나 이윤석이나 프로레슬링을 실시간으로 보았던 세대이니. 생각할수록 참 아쉽다.
무한도전 덕분에 떠오르고 말았다. 그 시절의 순진하기만 하던 꿈들이. 그렇게 믿고 싶던 사실들이.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믿고 싶은 그런 환상들이. 판타지가. 여전히 악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의 주인공은 올곧이 정의를 지키며 그것을 이겨내고... 그래서 영화도 보고 만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는 것이겠지만. 현실은 아니더라도 그러기를 믿고 싶다.
인간은 어떻게 해도 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란 평생을 살아도 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순수를 간직하는 한. 그런 순수한 열망을 한 구석에 가지고 있는 한. 그래서 인간은 그럼에도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일게다. 아이란 자라는 것 말고는 하는 것이 없으니.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유재석과 박명수와 노홍철과 전진과 정형돈과 정준하와 길과, 게스트로 출연한 김민준도 어느새 어린 아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보는 나도 아이가 되어 있다. 왜 갑자기 벽에 몸을 갖다 부딪히는가. 천진스런 웃음이 어울리던 시간이었다. 마치 그 시절 철없던 개구장이가 되어. 바보가 되어 버렸다.
프로레슬링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다른 것 없다. 꿈을 보여주면 된다. 그때의 꿈이 아닌 지금의 꿈을. 지금에 어울리는 꿈들을. 무대에는 꿈이 있어야 한다. 경기장에도 꿈이 있어야 한다. 링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프로레슬링은 어떤 꿈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마 그 답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덧, 낮잠을 자느라 남자의 자격을 못 봤다. 재방이던가?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깨어나 보니 7시 30분이다. 날이 너무 덥다. 지친다. 남자의 자격은 조금 있다 다시보기로 봐야겠다. 피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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